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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의 우람한 줄기가 서북으로 에워싸이고 응천의 질펀한 흐름이 동남으로 굽이치는 곳. 넓고 기름진 들판에 아늑한 마을이 팔방의 영묘한 기운을 다 모았다. 신령스런 땅에 훌륭한 인물이라. 우리 최수봉의사가 그 정기를 받고 태어나니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겨레의 얼을 일깨운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의사의 본명은 경학이오 수봉은 후일에 고쳐 쓴 이름이며 본관은 경주인데 1894년 3월 3일 이곳 마산리에서 고고의 소리를 울렸다. 천품이 영특하고 기상이 뛰어나 소년시절부터 향학의 열정이 남다르더니 15세에 동화학교에 나아가 을강 전홍표선생은 훈도를 받았으며 동래 명정학원을 거쳐 평양 숭실학교에도 적을 두었다.그러나 망국의 사무치는 원한속에서 왜적의 억압에 발붙일 곳을 잃고 광산노동자와 우편집배원으로 전전하며 쌓여가는 적개심을 불태웠다.1919년 삼일운동의 함성이 터지자 고향으로 돌아온 의사는 석정 윤세주선생등과 밀양의 만세시위를 주도했으며 급기야 왜경에 쫒기는 몸이 되어 만주 땅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길림에서는 약산 김원봉선생이 조직한 의열단에 가담했으며 무장독립투쟁을 위해 폭탄의 제조기술도 익혔다. 1920년에 제1차 의열단의 거사가 실패하여 백민 황상규선생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이 검거되자 향리로 잠입한 의사는 그 통분함을 이기지 못해 악형과 고문의 소굴인 밀양경찰서의 폭파를 결심하였다. 치밀한 계획을 거듭한 끝에 그해 12월 27일 비밀리에 입수한 사제폭탄 2개를 서장실에 투적하는 쾌거를 감행한 것이다. 의사는 곧 작렬하는 폭음을 뒤로하고 피신한 민가에서 자결직전에 체포되었으며 수개월의 모진 옥고를 치르고 1921년 7월 8일 대구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승천하시니 때에 나이 28세였다. 나라가 광복된후 1963년에 이르러 대한민국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일제하에 가매장 상태에 있던 의사의 무덤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이에 의사의 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