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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수(姜人壽)는 경남 밀양(密陽) 사람이다. 김원봉(金元鳳)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군사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1924년 10월에 중국군 간부 양성 학교인 황포군관학교(黃 軍官學校) 제4기 보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그후 중국군 장교로서 교관(敎官), 중국군 배련영장(排連營長) 부단장 주임(副團長主任) 등을 역임하면서 대일전(對日戰)에 참여하였다. 1940년 7월부터는 조선의용군 및 조선민족혁명당 특파원 등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가 환국을 결정함에 따라 일본군내의 한적 사병 접수 업무 및 광복군의 확군 문제와 일본군 무장해제의 협조, 그리고 한국 교포들의 생명, 재산 보호를 위한 임시정부와 중국 정부간의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李靑天)장군의 명령으로 광복군 각 지대에서 일본군 점령지역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도록 하는 동시에 일본군내 한적 사병을 접수하여 잠편지대(暫編支隊)를 주요 도시에 설치하게 되었다. 한적 사병의 인원을 약 10만 명으로 보고 기설 3개 지대 외에 7개 잠편지대를 증설하여 도합 10개지대로 확장하며 각 지대는 완전한 사단 편제로 조직한다는 계획이었다. 따라서 잠편지대는 1945년 10월 중순부터 10월말까지 전방에서 각각 조직되었다. 이 때 그는 광동(廣東) 잠편지대에 참모로 배속되어 지대장인 최덕신(崔德新)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51년에는 중국군 육군 소장에 승진되어 계속 복무하다가 1965년에 퇴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