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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규(黃尙奎) 1891.4.19. ~ 1931.9.2. 독립장(1963) 밀양시 내이동 957 이곳은 백민(白民) 황상규 선생의 생가터이다. 백민이란 호는 백의민족의 준말이기도 하지만 '헐벗은 민초'를 나타내는 뜻이기도 하여 민족을 사랑하는 선생의 마음이 담겨 있다. 상동 고명학교.동화학교 교사, 비밀결사인 일합사 조직, 대한광복회 활동을 하던 선생은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윤세복 선생과 연결되어 북로군정서의 재무총책으로 활약하면서 대한독립선언의 39인 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이후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 재무를 담당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선독립군정사로 개칭한 뒤 무장투쟁을 준비하면서 육탄혈전을 위해 '의열단' 조직을 구체화하면서 조카이자 제자인 약산 김원봉을 불렀다. 의열단을 후원하던 선생은 의열단의 제1차 국내기관총공격 당시 직접 국내에 잠입하여 거사를 주도하였으나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구속된 선생은 혀를 깨물고 자백하지 않아 백지기소를 할 수 밖에 없는 백절불굴의 의지를 보여 일제경찰을 놀라게 했다. 출소 후 신간회 밀양지회, 중앙상임위원회 서기장을 역임하면서 광주학생 항일운동을 직접 조사, 지도하였다.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밀양지역 노동야학원과 여자야학원을 설립하여 소외된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는 등 작고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선생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10만의 문상객이 모여들자 경기도 경찰국의 경찰까지 동원되었다. 당시 기사에는 '황상규의 가정은 가난에 가난이 더하여져서 집도, 한 뼘 땅도 없다'고 전할만큼 선생은 모든 것을 바친 이곳 밀양의 진정한 스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