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page


312page

곽재기(郭在驥, 1893~1952) 자는 경(敬)이고, 김광삼(金光三).김재만(金在萬)이라는 가명을 썼다. 1893년 2월 7일 충청북도 청주군 강외면(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상봉리의 농민가에서 태어났다. 향리의 보통학교와 서울 경신학교를 다니고 졸업한 후 1907년 청주 광남학교(후일의 청남학교) 교사가 되었다. 1909년부터 조직되기 시작한 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당(단)에도 가입,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일 청주 일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붙잡혀 갇혀 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결정되어 풀려났다. 동년 7월 만주 길림으로 가서 조선독립군정사 회계과장인 황상규를 만나 작탄투쟁을 위한 청년결사대 조직에 합의하고 구체적 방안을 숙의하였다. 10월에 김원봉이 규합해 온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동지들과 합숙하여 폭탄 제조법과 사용법을 익히고, 11월 10일 의열단 창립에 참여하여 부단장이 되엇다. 12월에 단장 김원봉 및 단원 이성우.이종암과 함께 상해로 가서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에 쓰일 폭탄 16개와 권총 2정, 탄환 100발 등의 무기류를 구입하였고, 안동현을 거쳐 밀양과 부산으로 나누어 들여보내는 데 성공하였다. 1920년 3월 하순에 단원들의 밀입국 후 대기 상황을 점검하고 실행 임무를 부여코자 서울과 밀양을 다녀갔고, 5월에 재입국해서는 서울 공평동 전동여관에 거처를 잡고 지휘소로 삼았다. 경남 창원군 동면 무점리의 한 농가에 숨겨두어진 폭탄 13개의 보관 책임자인 이수택에게 조속 결행의 뜻을 전하고 서울로 보낼 것을 수차 요구했으나 이행이 미뤄지고 있던 중에, 6월 20일부터 서울에서 단원들이 경찰에 붙잡혀가기 시작했다. 이에 급히 밀양과 부산으로 가서 폭탄을 인수하려다 7월 5일 체포되고 말았다. 8개월여의 경찰조사와 검사국 예심을 거쳐 재판정에 섰을 때, "재작년 3월 이래로 조국독립을 입과 붓으로는 구할대로 구하고 원할대로 원하였으나 피로써 구한 일은 없었음에서, 무기를 사용하여 혈전을 벌이려 했던 것이다. 우리는 군함도 대포도 없이 오직 폭팔탄과 육혈포밖에 구할 것이 없었노라"고 열변을 토하였다. 1921년 6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아 마포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1927년 1월 만기 출옥하였다. 1952년 1월 10일 별세하였고,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