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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씨이다. 공은 본래부터 강직한 천성과 개결한 지조와 명철한 재예로서 경사에 소양이 깊었으며 소시로부터 우국애족에 관심을 가졌다. 1907년경 한말을 당하여 민족은 도탄에 빠지고 국가는 누란의 위기에 처했다. 이때 경기 양주에서 창의대장 이인영의 대일항쟁에 분연히 참가하여 활동하였으며 그 익년에는 순국한 이강년의 유지를 받아 소백산을 중심하여 의병간의 많은 연락을 계속했다. 그러나 국운의 부진으로 한일합병이 늑성되자 누년간 망명생활로서 국내외를 왕래하였으니 만주에서 부민단의 이상룡 등과 활동을 같이하고 국내에서는 독립의군부를 창설하여 국권반환을 왜정에 항의했던 임병찬 등과 제휴하여 항일투쟁에 심혈을 다함에 고종황제로부터 가선대부 독립의군부 소모관의 칙지를 받았고 급기 3.1운동이 전개되자 오세창 권동진과 깊은 유대를 맺었다. 이로서 공은 7년간 의병투쟁과 8년간 지하운동과 수십년간 피신생활로서 청장기를 남김없이 조국광복에 기여하였고 또 오매의 숙제이던 8.15 해방을 생전에 맞이하고 68세를 일기로 영면하셨으며 1980년에는 독립유공으로 국가의 훈전에 등록되었으니 오- 그 의지 그 생애 참으로 거룩하시어라. 공의 묘는 삼랑진 용화동 을좌원이요, 배 우씨와 쌍분하다. 슬하에는 3남 3녀가 있으니 다 우씨 출이다. 남에는 용규 용순 용단이요. 서에는 손기태 신현재 이구범이며 용규의 자는 우곤이요. 용순의 자는 형준 학준 범준 희준 홍준이요. 용단의 자는 치준이다. 명왈 天賊人材(천적인재)에 各以時適(각이시적)이라. 治日寛柔(치일관유)요 亂世剛直(난세강직)이라. 公生韓末(공생한말)에 視死如職(시사여직)이라. 匪鐡其膓(비철기장)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