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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과 석정의 항일운동 - 동화중학이 폐지된 이후 석정동지는 상경하여 오성중학에 입학하였고 나는 중앙학교에 다녔다. 그 후 나는 먼저 중국에 망명하였으나, 석정동지는 1919년 3.1운동이 폭발되자 그는 우리 고향의 여러 동지들과 같이 지역의 대중을 동원하여 대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그는 중국 요녕성 유하현에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평소 숙원이던 군사학을 배우게 되었다. 당시에 나도 그곳을 가서 석정동지를 다시 만났다. 그 이후 그와 나, 그리고 다른 동지 도합 13인이 길림성으로 와서 의열단을 조직하고 제1차 거사 계획으로서 조선총독부, 매일신문사, 동양척식회사를 파괴할 것과 적의 관공리, 청남노, 친일부호 등 칠가살을 암살할 것을 결정하였다. 석정동지는 당시 불과 19세 나이로 폭탄을 휴대하고 국내에 들어가 파괴 공작을 추진하였으나 유명한 의열단 제1차 거사는 불행히도 실패되어 폭탄, 권총, 선언문 등이 적탐에게 압수되고 동지 100여인은 피체되고 구금되었다. 출옥 후 그는 왜적의 감시가 극심하고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위해 조국을 떠나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1932년 여름 그는 남경에 와서 나와 상봉하였다. 1935년 5당 통일회의시 그는 의열단 대표와 1938년 조선의용대 창군 후 요직을 역임하였다. 1940년 겨울 조선의용대 제3지대를 이끌고 화북에 진출한 후 1942년 5월말 태항산중의 마전 반격전에서 석정동지는 불행히도 적탄에 의해 중상을 입고 6월 3일 산록흥룡동 석굴속에서 영면하였다. 석정동지는 일체의 행복과 심지어 최후 한감의 피까지 조국의 독립에 바쳤다. 그가 죽음으로 인하여 나는 일생 동생사 공환란 하던 가장 친밀한 전우를 읾게 됨으로 인하여 시시로 내심으로부터 나오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