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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경현의 여세명집에서 전략회의를 하던중 친일단체였던 보민회의 밀고로 현장에서 조선혁명당 집행위원 주석 이호원 군사위원회 위원장 김보안등 13명의 주요 간부들이 왜경에 의해 체포되는 흥경사건이 일어났다. 1934년 국민부는 각군 부대장회의를 소집하여 국민부를 조선혁명군으로 개칭하고 양세봉을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추대하고 참모장에는 김학규 조선혁명당 주석에 고이허, 재정부장에 공이 임명되어 중국 의용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하였다. 특히 공은 군자금 확보를 위해 한인에 대하여 매호당 1년에 2원의 세금을 부과하여 군자금을 확보하는 한편 조혼 중혼 술주정 아편 흡연 도박 미신 신앙자에게 벌금을 매겨 동족간의 일체감과 애국심의 고취에도 노력하였으나 일제의 치밀한 작전과 억압으로 소기의 목적 달성이 순조롭지 못하게 되자 이에 공은 혁명군의 어려운 재정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관할지역에서는 식량의 외부 반출을 금지하고 불태환 지폐인 양표를 발행하여 조선혁명군 대원이 식대로 현금 대신 지불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양세봉 고이허 등과 협의하여 혁명군 외교관원인 최동오를 비밀리에 남경에 파견하여 국민당정부에 항일군자금 지원을 처원하였고 1934년 6월 혁명군참모장 김학규를 다시 남경 국민당정부에 파견함과 동시에 남경에 있던 의열단장 김원봉과 교섭하여 장개석과의 면담을 추진하는등 밖으로는 혁명군유지활동을 위한 외교적인 노력과 안으로는 양세봉과 함께 만주지역 한인사회 농민들은 물론 만주인들과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함으로서 지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조선혁명군의 항일투쟁활동의 중심에는 공이 있다는 것을 탐지한 일제는 위만주국 군경과 공조하여 공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거금의 현상금과 함께 특무원을 별도로 파견하였다. 당시 남만주에서는 이상관이란 이름보다 후두부에 혹 때문에 혹뿔이 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었기에 공은 혹을 제거하고 얼굴에는 황산으로 마마를 만들어 일제가 알아볼 수 없도록 변신하였다. 한편 일제는 공의 가족 전원을 환인현성 헌병대에 구금하고 공의 투항을 유도하면서 온몸에 피투성이가 되도록 갖은 고문을 서슴치 않았다. 아! 슬프다. 1936년 12월 15일 동변도 특별공작부 환인지부 횡도천 공작원 정만기 박수림이가 공의 행적을 찾아내어 횡도천 경찰을 앞세워 공을 손호봉 집에서 체포하여 환인현 헌병대로 압송한 다음날 항공기편으로 봉천 북대영으로 이송한 후로는 일체의 흔적마저 없어졌으니 필시 적수에 의해 훼기 순국하였음이 분명한데 시해마저 수습치 못하였으니 분묘가 있을리 없고 순국한 일자마저 알수 없어 피체일을 기일로 삼고 우금봉사해 오던중 광복 63년만에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공의 영전에 추서되어 그 위적이 늦게나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니 하늘이 무심치 않음이로다. 배 밀성손씨 홍수녀는 1892년생으로 만주에서 부군의 독립운동을 음양으로 돕다가 1928년 무진 5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