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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사 이공의 휘는 정헌이요. 관은 함평으로 고려 진무위 대장군 함풍군 휘 언이 시조요. 누전하여 증 통정대부 병조참판 휘 종수는 파선조로 공의 15대조요. 삼전하여 문과시간 지제교 휘 추근 호 죽담은 공의 12대조시다. 이전하여 무과 도총부 경력 절충장군 행용양형 부호군 휘 선지가 밀양에 존거하니 공의 10조요. 고조의 휘는 능운 호 일옹이요. 증조는 통정대부 절충장군 중추부사 오위장 휘 유봉이요. 조는 부사과 휘 택서 호 지수요. 고휘는 민주요. 비는 안동권씨 의석 녀로 공은 1890년 4월 1일 부북면 퇴로리에서 출생하여 백부 민우후로 출계하니 비는 진주유씨 원릉참봉 진성녀라. 공은 경술국치로 국권을 잃었을때 망국의 한을 품고 1918년 당년 28세에 만주 환인현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창립자인 이시영 공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 학교를 졸업하니 이시영 공은 공에게 재정 관리역을 맡겼다. 1922년에는 밀양으로 돌아와 부인과 아들 계옥 및 동생 경헌 등 전가족을 남만주 가호강으로 옮겨 정착시키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당시 만주지역 독립군 조직은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로서 북만 동만 남만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공은 정의부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부득이 상관으로 개명하고 39세때에 환인현 남구 총관이 되어 독립군 강화에 힘쓰던 중 1929년 5월 28일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가 국민부로 통합됨에 따라 공은 경제위원장 장승언의 부관으로 임명받아 재정 및 물품 조달 업무 일체를 주관하였다. 당시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는 군자금 확보가 중요함을 인식하고 때로는 상인으로 위장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인 신빈 등 주변 11개현을 동분서주하면서 엄동설한을 물릅쓰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1931년 12월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중앙 주요간부 30여 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