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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주 열사 생가지(尹世胄 烈士 生家址) ● 소재지: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880번지 이곳은 윤세주 열사가 태어난 터이다. 열사는 1901년 6월 24일 아버지 윤희규(尹喜奎)와 어머니 김경이(金卿伊)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인 하소악(河小岳)과의 사이에 1남(南善, 아명:龍文)을 두었다. 밀양공립보통학교와 동화학교를 거쳐, 서울의 오성중학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열사는 밀양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일제의 체포령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11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린시(吉林市)에서 김원봉·황상규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국내외를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6월 일제침략원흉 암살과 일제침략기관 폭파 거사를 위해 부산과 밀양에 반입한 폭탄과 무기가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되었다.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27년 2월 석방되어 밀양청년회 및 신간회 밀양지회 활동 등을 주도하였다 1932년 여름 열사는 중국 난징(南京)으로 망명하여 의열단 활동에 합류하였다. 1933년 4월 의열단에서 운영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1기생으로 수료하였으며, 이후 교관으로 학생들을 훈련시켰다.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창당된 뒤, 열사는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며, '김원봉의 오른팔'이 되어 1930년대 후반기 중국관내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중국 장시성(江西省) 싱즈(星子)에 있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의 교관이 되어 한인청년들을 양성하였다. 이들을 기반으로 이듬해 10월 열사는 후베이성(湖北省)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결성하였고, 정치위원으로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하였다. 1939년 8월에는 스추안성(四川省) 치장(綦江)에서 소집된 '한국혁명운동 통일7단체회의'에 참석하여, 한인 독립운동세력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1년 봄, 열사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조선의용대 주력부대를 이끌고 중국화북지역의 항일최전선으로 이동하였다. 1942년 5월 28일 산시성(山西省)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이른바 '반소탕전') 중상을 입고, 6월 2일 전사하였다. 열사는 전우인 진광화(陳光華)와 함께 타이항산 스먼촌(石門村)에 묻혔다가, 1949년 10월 허베이성(河北省) 한단시(邯鄲市)에 있는 '진기로예 열사능원(晉冀魯豫烈士陵園)' (동묘구 3열 17번 묘역)에 안장되었다. 1982년 대한민국정부는 열사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