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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망을 뚫고 중국으로 탈출하였다가 그해 12월 단신으로 다시 국내로 들어와 고향친구 최수봉동지와 함께 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차목표를 달성하셨다. 불행하게도 최수봉동지는 일경에 체포되었고, 선생께서는 친구를 잃은 피맺힌 한을 조국광복으로 씻겠다는 강열한 일념으로 남천강 주중으로 피신하여 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의열단 활동을 지도하였다. 선생께서는 1922년 3월 일본 육군대장 타나카 기이찍 상해를 방문할때, 이종암동지와 함께 폭탄을 제조하여 김익상과 오성륜으로 하여금 그를 폭사핟고록 지휘하였다. 이 거사는 전일본군을 경악하게 하였을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기상을 전중국 대륙에 널리 떨쳤다. 이렇듯 의열단의 실행부가 전방위 폭력항쟁을 계속적으로 감행할 수 있었던것은 선생을 비롯한 김원봉, 이종암, 한봉인, 윤자영등 5인으로 구성된 최고 참모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5인참모부는 의열단 최고 의사결정 기국로, 계획의 입안, 자금동원, 대외정치선전등 의열단의 모든 활동을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총괄지휘하였다. 1924년에 이르러 일제의 전방위 압박전략으로 의열단은 극심한 자금난과 조직활동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되었다. 이러한 어려움속에서도 그해 3월 선생은 일본 총선거및 임시의회 개회를 저지하기위해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또한 선생께서는 1924년 상해에서 개최된 상해청년동맹 창립에 의열단 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운동단체의 연대와 단결을 호소하였을뿐만 아니라 1925년 상해파 고려공산당 중심의 청년동맹과의 노선공방에서 민족주의 노선을 일관되게 주창하였다. 1925년 여름 의열단은 본부를 상해에서 광주로 이전하고, 1926년 초 김원봉은 의열단이 당면한 난국의 타개하기위해 다수 창단동지들의 견해와 달리 후배동지들과 함께 국민당 정치군사 간부학교인 황포군관학교에 합교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선생께서는 김원봉의 지나친 군사주의와 사회주의 편향에 반대하며, 의열단창단부터 7년간 줄기차게 지켜온 항일폭력투쟁과 민족주의 노선을 확고히 견지하여 황포군관학교 입교를 거부하였다. 역사는 약산의 군사주의 전략과 독립운동에서 사회주의의 포용도 평가해야하지만, 동시에 초산선생의 창단이념에 근거한 폭력투쟁과 독립운동에서 확고한 민족주의 노선도 당연히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후 선생께서는 창단이념에 입각한 의열단 재건을 주창하며 1926년 복건성 ?문에 계시다 천주 설봉사에 은신하였다. 선생께서는 설봉사에서 철저한 수련과 참선으로 심신을 단련하며 의열단 재건을 불태우다 1927년 10월 19일, 31세의 피끓은 젊은 나이로 한 많은 독립투사의 생애를 이억타국에서 마감하니 어찌 통한스럽고 애석한 일이 아니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