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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조직된 대한광복단에 참여, 대구 악질부호 장승원을 사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일본경찰로부터 그의 행동이 주목받게 되자 1918년 만주의 길림으로 망명, 서일, 유동열, 김규식, 김좌진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재정담당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였다. 1918년에는 기미독립선언서보다 1년 앞서 만주에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여기에서도 재정위원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금에 힘써 당시 18만원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모았다. 1919년 11월 9일 길림에서 김원봉, 곽재기 등과 의열단을 조직, 그 일원으로 소위 밀양폭탄사건에 가담하여 검거된 뒤 징역 7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는데, 일본경찰의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의 혀를 깨물어 끝내 자백하지 않아 일본경찰은 백지로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출옥한 뒤 신간회조직에 참여, 서기장에 임명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백민 황상규는 김원봉의 고모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