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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정에 분개하신 나머지 방년 18세에는 족숙 병률 의사를 도와 애국성금을 밀모하여 상해지역을 비롯한 해외 각지 독립운동 지사에게 자금 밀송의 일역을 하시다가 1929년 광주학생사건을 계기로 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갈 무렵 허의사께서는 대구학생들을 총봉기케한 계획을 세우시고 대구에 거주 중이던 문객 최한영을 설득하여 우국동지회에 많은 동지들을 입적시켜 가는데 온갖 정열을 다하셨다. 이와 같은 일을 주재해 가면서 한편으로는 야간을 이용하여 대구 시내 도처에서 토왜격문을 첩부 또는 살포하면서 대구여고보 및 대구상업 등 거시적인 학생 궐기를 도모하시던 중 왜경에 발각되어 검거 구속되었다. 만사위기임이라는 신념으로서 단독소행이었음을 강?하여 동지들을 무사 출옥케 하고 계속되어지는 옥중 투쟁과정에서 목불인견의 전기고문과 구타 등으로 이롱증을 일으키는 고초 속에도 끝내 굴함없이 버티신 결과 당시 왜인판사 송하로부터 8개월형을 받고 출옥해야 했었던 질곡을 겪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중 집회가 있을 때에는 자신이 요시찰인이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시위집회대열속에 잠입하여 독립만세 열창에 앞장 서셨다. 그것이 죄목이 되어 수차에 걸친 감금생활을 거듭 당하시다가 극심했던 고문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1951년 4월 8일 향년 43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의사의 공훈자료 수집 지연으로 인하여 1993년 8월 15일 광복절에 즈음해서야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이 서훈되었음에 허의사의 투철하신 애국애족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하여 기념사업회에서는 각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