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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조의 肇基(조기)하신 3243년 경술 이 神州(신주)는 왜인의 呑併(탄병)을 입었다. 우리의 많은 충신 의사 과거 을미의변 을사의 협약 등을 전후하여 죄다 就義歸天(취의귀천)하였으며 적의 창졸은 운둔하고 흉계는 임립하여 2천만 桓儉辛胃(환검신위) 오직 소리를 머금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적의 쇠사슬에 묶였다. 하양의 허병률 의사는 비록 나이 약관이오. 한낱 白面書生(백면서생)일지나 스스로 대동남아로써 ○魯 鄕 嶺南(○로 향 영남)에서 문경공 정간공 충의의 흐름을 이어받아 가슴의 피 끓어올랐다. 이에 널리 聲氣相應(성기상응)할 인재를 찾아 4250년 박상진 채기중 김우진 등 제동지의 결성한 광복회에 가맹하여 멸왜보국에 생명을 바치기로 신명에 誓告(서고)하였다. 어찌 뜻하였으리 행동 개시의 중도 적에게 탐지되어 다수 동지 혹 순열하고 혹 무명하였던 바 4252년 우리 겨레는 총궐기하여 독립을 선포하고 임시정부를 상해에 두자 공은 곧 달려가 임정의 군정사에 들어가 그 지령으로 입국하여 애국성금을 募収送納(모수송납)하다가 被虜(피로)하여 갖은 滛刑酷訊(음형혹신)의 7년 敵行(적행)에 그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4261년 출옥 귀향하자 萬頃田土(만경전토)를 無償給與(무상급여)하려는 적의 유혹을 断然拒斥(단연거척)하고 다시 망명하였다가 그 익년 지하운동의 사명을 띠고 재입국하여 언론으로써 민족정기를 북돋우려고 조선일보 대구지국의 총무를 밭았는데 때마침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족질 동훈을 시켜 영남학도의 분발을 종용하는 격문을 살포하다가 동훈의 체포 수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4270년 다시 광복회의 옛 동지 우재룡 등과 지리산에 들어가 제2차 획책을 하였으나 전년 拷掠(고략)의 餘毒迸發(여독병발)로 그 익년 돌아와 대곡산중에서 隱身療養(은신요양)하면서 청소년의 정신 계발에 宻宻主力(밀밀주력)하다가 4275년 12월 2일 대한독립만세의 마지막 부르짖음을 남긴 채 56년의 투쟁일생을 마치었다. 그야말로 고인의 이른 바 부귀로도 능히 물들게 못하고 빈천으로도 능히 옮기게 못하고 멸시로도 능이 굽히게 못하는 대장부 그 사람 아니었던가. 공의 돌아가신 3년째인 4278년 적의 항복으로 공의 血願(혈원)이었던 조국광복이 이루어졌으며 4296년 3.1절 대통령표창의 건국공로상이 追施(추시)되었다. 정의는 마침내 이겼다. 이에 공의 遺烈(유열)을 景仰(경앙)하는 기념사업회에서 이곳에 돌을 세워 그 정신을 영원에 끼치려 하니 이 곳은 공의 본고장 그 애국활동의 출발지요 끝마치신 곳이라. 銘(명) 나라의 광복 임의 그 일념 겨레의 자유 임의 그 血願(혈원) 굽힐 길 있었으리. 굳센 공의 모습 만고의 팔공산 가실 줄 있었으리. 푸르른 그 절개 三冬(삼동)의 백척송 아으 단기 4300년 3월 일 풍산 류석우 근찬 경주 최한영 근서, 교육위원회 후원으로 기념사업회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