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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음주례를 거행하자 선생은 나이가 젊었는데도 주례의 자리에서 주선을 하였더니 방백이 특별히 집례로 선발하고 그의 관사로 방문하여 임하에 이와같이 성훈하고 덕망있는 사람이었구나 하고는 인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국법에 40세전에는 천거할수없는데도 그야말로 특천이었다.그러자 선생은 한숨을 쉬면서 군자가 벼슬에 나아감과 산림에 처신함은 의가 있으니 발걸음의 랑술이 한번 이긋나면 무엇으로서도 옳게할수없다고 하였다 또 정승 민영철가 선생을 보고자 청했으나 역시 응하지 않았다. 이때 사람들은 영달할수있는 절호의 기회를 왜 놓치는가? 하고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선생은 다 만물을 마시며 경전을 연구하고 선현을 계승하여 후인을 개척하는것이 나의 사업이라하였다. 이로부터 배우려오는 자가 많았는데 선생은 사문을 흥기시키려고 적성으로 타이르기를 게을리하지않았다. 4242년에 문묘수임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한일합방의 변이 있자 곧 사임했다. 이와함께 조선유학계에 위정척사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 바람은 유학자에게 일본에 항전하고 그 생정에 불복하는 행동을 고무시켰으며 또한 벼슬을 버리거나 단식과 두문불출로 일관하기가 예사였다. 선생도 예외일수없었다 그러자 일제는 작록을 주어 저명인사를 포섭하기 시작했다. 4246년 일제는 한일합방을 미화하고 문화적 정신적 침탈을 고착화하기위해 합방기념 훈패로서 국내의 유명인사에게 반포하였는데 선생에게도 미치었다. 선생은 가히 받을수 없는 뜻으로 육산시를 지어 답하니 그 시에 굶으면 서산을 본받겠고 먹으면 첩산을 본받으리라 숨어서 맹산을 본받겠고 변하면 비산을 본받으리라 살아서는 냉산을 본받겠고 죽으면 문산을 본받으리라 만남에 따라 육산을 본받는다면 구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