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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훗날 죽어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고 살아도 죽은 사람이 있다. 역사와 시대앞에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하게 정의를 구현하고 진실을 다한 사람은 비록 천명을 다하지 못했더라도 역사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사람으로 기억될것이며 반대로 자신이 영달을 위해서 진리를 ??한 사람은 아무리 영광을 누리며 살아도 민중의 심중에는 항상 죽은 사람으로 기억되기때문이다. 여기 스스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것을 버리고 설원의 청송처럼 청정한 기상을 남기고 살다간 위대한 선열이 있으니 바로 당세의 자랑이요 만세의 사표가 될 명암 이태일선생이다. 선생은 4193년 10월 15일 영천 원각리옛터에서 아버지 ?? 이승원과 어머니 대구서씨사이에 태어나니 본관은 벽진이고 자는 삼수이며 명암은 그의 호이다. 고려삼중대광 개국원훈 벽진장군 이염언이 시조이며 조선조 생육신 경은 이맹전이 현조이다. 그후 10대조 독락당 이지백과 6대조 삭와 이석화는 퇴계학통을 이어온 가학으로 학맥이 전해내려왔다. 이처럼 명현달사가 계승된 명문 거족의 학덕과 기품을 가슴에 품은 선생은 일찍부터 재능과 성품이 사람들의 의표를 벗어났으며 과거시험의 학업을 닦으니 문사가 일찍이 성취되고 필법이 정밀하고 건장하였다. 4221년에 성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시에 참여하였으나 과거의 길이 혼잡하게 뒤섞이고 뇌물을 주는것이 공공연히 행하여짐을 보고 드디어 시권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문호를 닫고 독서를 하면서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며 몸을 돌이켜보고 극도에 도달하는 방법을 삼았다. 선생은 여유롭게 당대의 석학인 서산 전흥락공과 향산 이만도공 그리고 석호 유도성공과 척암 김도화공의 제공들 사이에 종유하였는데 제공들이 모두 그릇을 무겁게 여기면서 척암공은 선생을 두고 그는 세상에 크게 쓰일사람이라 다만 글읽는 선비로만 대할수 없다고 하였다. 4224년에 방백인 이헌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