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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급속도로 쇠퇴해감을 보자 개연투필하고 구국의 길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며 한양에 가서 우국지사 단오정공 용기를 찾아 결사지의로 손을 잡고 큰일을 위하여 때를 기다리던 중 황제의 밀조를 받들고 퇴궁한 그 부공 동엄 정환직 선생의 명에 따라 영남으로 내려가서 산남의진을 창건할세 공은 소모 겸 연습장으로 각주군을 순회하며 수많은 의사들을 입진시키고 군수물자의 모집실적도 다대하였다. 연이나 행군 초 대장 단오공의 피검으로 파진되었다가 출옥 후 재거의 부서조직에서 우영장으로 전투개시 청하에 칩거한 왜적을 2회 연달아 습격하여 ??하고 회군하여 신녕 의흥의 잠복 적을 격멸하고 청송으로 진군했다가 안덕 신성에서 추적해온 적을 격퇴한후 동남으로 행군하야 운가산울에 유진중 영천에서 내습한 적을 자양에서 격파하고 죽장 매현리 주둔중에 치른 입암접전에서 대장의 전사로 파진되자 막하 제장들이 그 부공 동엄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한 제3차 의거에서 공은 좌영장으로 전임하야 흥해읍을 공격해서 그 소굴을 소각하고 서북으로 회격하여 청송과 의성에 잠복한 적을 격멸한 후에 주소산으로 이동하야 탄약을 제조해서 진로를 동해간도로 잡고 북상중 영덕에서 동암선생이 피체되어 순국하자 농고 최공 세윤을 대장으로 한 제4차 의거에서 공은 우포장을 수임하야 장순읍의 둔적을 습파하여 그 소굴을 소각하였다. 광주를 비롯 보현산과 운주산에서도 온 산천을 피로 물들였다. 그밖에도 이리령전투 달성접전 사비혈전 등을 치르고 안예지역으로 이동하다가 의성 춘산에서 적과 충돌하여 참패를 당한 끝에 파진되자 진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소진으로 분산된 체 영남천리를 누비며 유격전술로 적을 괴롭혔다. 저 운무속의 산곡능마다 공들의 발자취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도다. 1910년 국치후에 그들의 유인정책으로 방면되자 지하운동으로 변신하야 항쟁의 고삐를 늦춤이 없었으나 국권회복의 기미는 거익난망이라 이가 병이 되어 1929년 3월 14일에 4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셨다. 묘는 관리선좌원이다. 배 광주노씨는 도정 석기 녀로 묘는 고지리 봉산선좌이다. 생 남1녀1 하니 남은 종기요 여는 김기?이다. 손에 남장은 진우로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