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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9년 을사 왜인이 역신을 조종하여 협약을 강행하매 이르러 이 땅이겨레를 삼킬려던 그 흉계 명백히 나타났다. 이러한 안팎으로의 중압에 자유를 잃어진 광무제는 그 가장 의신하던 충정한 시종신 정환직에게 경이 화천지수를 아느냐 짐망이라는 밀유를 내리웠다. 이에 환직은 그 아들 용기로 하여금 귀향하여 의사를 일으켜 강릉으로 북상하게 하고 자신 중앙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제를 뫼시고 이에 합세 최후의 일전을 할려고 계획하였다. 용기 부명을 받들고 그 익년 춘 고향 영천에서 모여든 의중 천여의 추대로 등단하여 산남의진의 깃발을 들어 북상도중 경주 신광지역에서 적신의 간계에 빠져 대구옥에 갇히고 중군 이한구 의사를 대신 거느렸다가 그대 일시 해산하기로 되어 의거는 중도좌절되었다. 중앙에서 그 정보를 들은 환직의 밀봉에 의해 제의 은명으로 용기 출옥되어 옥고에서 얻은 신병을 치료하여 제2차 의거를 한 것은 그 익년 4월이었다. 그래서 청송의 신성 영천의 자양 의흥 청하등지에서 적을 연파하고 영해우군 신태호와 연락하면서 북상준비중 동년 9월삭일 영천 입암에서 적을 맞아 한구 및 손영각 권규섭등과 함께 전순하였다. 부장 정순기 이세기 우재룡등은 패병을 거두어서 북상?독차 귀향한 환직을 받들어 진용을 중정하여 신녕 의흥 흥해 청하 영덕등 읍을 역점하여 일로북상중 적의 급습으로 청하지역에서 붙잡혀 대구로 호송되여 만반유인에 굽히지 않고 적을 통?하면서 "身亡心不變 義重死猶輕 後事憑誰託 無言坐五更"의 시를 남긴채 동년 11월 16일 영천남교에서 적탄에 필명하였다. 3차의거 다 이 같이 실패되자 평일 환직의 유?으로 그 후계자에 지목된 최세한이 잔중을 이끌고 보현산에서 전패피집하여 한경에서 옥순하였고 이세기 다시 북동대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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身亡心不變:몸은 죽으나 마음은 변치 않으리 義重死猶輕:의리가 무거우니 죽음은 오히려 가볍도다 後事憑誰託:뒷일은 누구에게 부탁할꼬 無言坐五更:말없이 앉아 오경을 넘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