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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의 민족의식 형성과 실천 61 어 하기강습소는 조선어학회의 모태인 朝鮮言文會에서 주시경 등이 주 도하여 개설했던 것이다. 김용곡을 소장으로 한 1914년 명정학교 조선 어 하기강습소에서는 24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22) 김법린의 훗날 조 선어학회 활동은 이때 권덕규와 인연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서상일은 대구 출신으로, 항일 결사단을 조직했다가 발각되어 범어사 에 3년 간 은신하였다. 23) 그가 머문 시기는 정확치 않지만 김법린이 범 어사에 있던 1916년 전후로 여겨진다. 권덕규와 서상일은 출신지가 달 랐지만, 같은 大倧敎 청년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24) 3. 유심사와 한용운 범어사는 1912년에 서울 典洞 중동학교를 인수하여 포교당으로 사용 하고, 명정학교 졸업생을 선발하여 서울 휘문의숙에 공비유학을 보냈다. 1917년 김법린도 서울 휘문의숙에 입학했다가, 中央學林에 편입하였다. 김법린은 한용운(1879-1944)이 중앙학림에 왕래하여 특강을 한 일을 계 기로 그와 첫 인연을 맺은 듯 하다. 그는 한용운이 1918년 9월 서울 계 동 43번지 유심사에서 창간한 잡지인 惟心 지 일을 거들면서 민족의식 을 키웠고, 이때부터 鐵啞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25) 김법린이 고백한 바 그의 좌우명은 永嘉集 서문의 ‘霜松潔操 水月虛 襟(서리 내린 소나무와 같은 맑은 지조와 물에 비친 달과 같은 텅 빈 22) 이규영(1988) p.164. 23) 서상일, 「自畵自讚」, 民主新報 , 1951.12.28일자. 24) 후술할 萬海 韓龍雲은 대종교 초대 도사교를 지낸 弘巖 羅喆(1863-1916)의 유고집을 간행하려다가 미완에 그쳤을 정도로 대종교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한용운과 대종 교 관계를 차후의 연구과제로 남겨 둔다. 25) 김광식(2004), 「만해, 불교청년들을 단련시킨 용광로: 한용운과 김법린」, 유심 통권 16호, 서울, (재)만해사상실천선양회, p.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