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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의 민족의식 형성과 실천 59 정기를 받고 金玎宅(?-1914)과 金岳伊(1874년생)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 본관은 金寧, 본명은 振麟인데 출가하여 법명을 法允에서 훗날 法麟으로 개명했고, 호는 梵山이다. 16) 김법린은 1910년 조국을 빼앗겼다는 소식에 비분통곡하며 서러워하던 어른들의 모습이 일생의 길을 지배하는 자극이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내 나이 열두 살 때(一九一○년-합방 당시), 조국을 빼앗겼다는 소식 을 듣고 비분통곡하는 어른들의 그 몸부림을 보았다. 그 분들의 서러워 하던 그 모습이 내 일생의 가는 길을 지배하는 자극이 되었던 지도 모른 다. 그래서 내 평생 동안 조국독립(祖國獨立)의 염원(念願)이 유일의 신 념처럼 몸에 배었을 것이다. 17) 유년기 김법린의 가장 큰 소망은 서울 유학이었다. 그러나 신녕보통 학교(1909년 개교-논자 주)를 졸업한 뒤, 몰락한 집안 형편 탓에 은해사 에 들어가 양혼허(1880-?)를 득도사로 모시고 공부를 지속할 수밖에 없 었다. 은해사는 신녕면 완전리에서 남쪽으로 6km 떨어진 청통면 치일 리에 소재하며, 동화사와 함께 팔공산의 대표적 명찰로 손꼽힌다. 양혼 허는 김법린과 동향 신녕면(원정리) 태생으로, 18) 경남 합천 해인사에 출 가하여 해인사 강사, 청암사(김천) 강사, 통도사(양산) 교원으로 영남 지 역에서 활동한 승려다. 19) 김법린의 출가가 대개 1912년으로 알려져 있 가리켜 준 바 있다.(2008.3.18.12:30-13:30, 완전리 자택에서) 「金振麟 除籍謄本」에는 김법린의 본적이 ‘완전리 41번지’로 기록돼 있다. ‘치산리’는 김법린 조부의 묘소가 있 는 팔공산 치산계곡 인근이고, ‘완전리’는 신녕초교(신녕면 화성리 714번지 소재) 앞 마을로 신녕초교와 도보 13분 거리(직선 640m)다. 정리하면, 김법린은 신녕면 치산리 에서 태어나 신녕면 완전리 41번지에 정착한 뒤 완전리에서 성장했다. 15) 김녕김씨대동보편찬위원회(1990), 金寧金氏忠毅公派大同譜 10, 서울, 김녕김씨대동보 편찬 위원회, p.447.; 「金振麟 除籍謄本」.; 김인봉 씨와의 전화통화. 16) 김녕김씨충의공파대동보편찬위원회(2005), 金寧金氏忠毅公派大同譜 10, p.519. 17) 김법린(1963) p.60. 18) 김수규 씨는 외가가 양씨인데 양혼허가 7촌 아제로 집안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증언 하였다.(2009.1.12.오후 4시, 완전리 자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