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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의 민족의식 형성과 실천 77 이극로가 한국의 문제 를 통하여 일본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고 박해 사례를 부각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감정에 호소해 관철시키려 했다면, 김법린의 연설문 은 한국의 교육문제를 중점으로 일제의 억지주장에 대해 구체적인 통계수치로 반박하여 일제의 실체를 폭로한 차이가 있 다. 김법린이 유럽을 비롯한 각 국 참가자들에게 일제의 침략상을 객관 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끔 유도하고 자신의 주장을 더욱 정당화한 점은 뛰어난 설득 방법이었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김법린의 유학 배경과 그 행적을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 그는 “유무형 간에 노력은 생명의 불멸을 의미하는 근본된 힘”이라는 신념을 가지고서, “언젠가 조국광복을 찾으리라”는 유일의 이상을 실현 하고자 끊임없이 실천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김법린의 민족의식 배경에는 한용운의 영향이 지대했다. 그는 승려로서 한용운의 가르침을 받고 3․1운동에 참가하였다.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계속 하다가 만주독립군과 학업의 기로에서 진학을 택한 뒤, 마침 내 프랑스에 유학해 철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멀리 이국에서도 스승이 안 국동 40번지, 곧 민족불교 수호의 상징인 선학원에 있음을 상기했다. 김법린은 유학 시절에도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하여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해 일제의 침략성을 고발했다. 유럽에서 김법린의 민족운동 실천 방법은 피압박민족대회 참 가 기회를 통해 유럽인들에게 일제의 실체를 널리 알려 각인시키는 것 이었다. 김법린의 ‘브뤼셀 연설’은, 과거에 은사의 지도를 받던 피동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