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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한국불교학 53집 본회 첫날인 2월 10일 김법린은 일제 규탄 연설을 했다. 50) 이극로는 분과위원회를 조직할 때 遠東委員會 정치산업부 위원이 되었으나, 대회 의 주요관심사가 反英운동이 주류를 이루어 한국 문제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에 이극로의 강한 항의로써 표결에 부쳐 약소민족 대표들의 동의를 얻었는데도 결국 부결되어 무산되고 말았다. 2월 14일 최종 회 의에서는 각 대표단의 결의안이 낭독되었다. 한국 대표단 결의안 은 “첫째,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독립 확보, 둘째, 한국에서 일본 스스로 취 한 모든 특별한 권리는 헛된 시도”라는 2가지 쟁점이었다. 51) 이는 본회 전날 이극로가 조선 대표 단장으로서 “(1) 馬關條約을 實行하여 朝鮮 獨立을 確保할 것 (2) 朝鮮 總督政治를 卽時 撤廢할 것 (3) 上海 大韓 臨時政府를 承認할 것”의 안을 대회 간부에게 제출했다는 이극로 자신 의 주장 52)과 차이가 난다. 그런데 IISG에는 위 2종의 문건이 한국 대 표단 결의안(RESOLUTION der KOREANISCHEN DELEGATION) 이라는 같은 제목으로 보관돼 있다. 이는 이극로가 2가지 결의안을 준비했다가 무난한 문장으로 된 전자의 문건을 제출하여 공식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 문제에 한해 아세아민족회가 설치되고 조선, 중국, 인도, 시리 아 4개국 중 조선위원으로 김법린이 피선되었다. 53) 그것은 ‘제국주의와 식민지압박을 반항하고 민족자유를 위하는 대연맹’을 창립하여 파리에 본부를 두고, 아시아 문제를 연구하고 연락을 용이하게 취하기 위해 파 리 거주자로 한정했기 때문이었다. 54) 김법린은 이후 12월 9일부터 11일 50) Liga gegen Imperialismus und für nationale Unabhängigkeit(1927) pp.148-158.; 조 선일보 , 1927.2.11일자, 「弱小民族大會開會劈頭 朝鮮代表의 獅子吼」. 51) Liga gegen Imperialismus und für nationale Unabhängigkeit(1927) p.261. 52) 이극로(1947) p.37.; 본회 전날(2월 9일)에는 신문기자 초대회가 열렸다.( 조선일보 , 1927.3.21일자, 「(一)弱小民族大會實記」.) 53) Liga gegen Imperialismus und für nationale Unabhängigkeit(1927) p.242.; 조선일 보 , 1927.3.22일자, 「亞細民族會 대연련과 서로 연락을 취해 朝鮮委員으로 金氏被選」. 54) 동아일보 , 1927.3.23일자, 「朝鮮側委員 金法麟氏 略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