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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의 민족의식 형성과 실천 69 1926년 9월, 상하이 조선청년동맹회에서 이 대회에 출석할 대표를 위 한 자료수집에 착수했고,43) 1926년 12월, 내년 봄 1월을 기해 벨기에 브 뤼셀에서 피압박민족대회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44) 1926년 12 월, 국내에서 2개 단체와 대표가 파견된다는 기사 45) 가 나자, 경찰당국이 비상경계와 각 단체를 예의주시하기도 했다. 46) 피압박민족대회 47) 개최는 1927년 2월 10일~15일, 장소는 브뤼셀 에 그몽 궁전으로 확정되었다. 위원장에 영국인 조지 랜즈버리(George Lansbury, 1859-1940), 부위원장에 네덜란드인 에도 핌멘(Edo Fimmen, 1881-1942), 뮌첸베르크와 함께 인도인 샤토파디아야(V. Chattopadhyaya, 1880-1937)가 사무총장을 맡았다. 대회장에는 21개국, 174단체의 대표단 이 참가하였다. 48) 한국에서 공식 참가한 사람은 李克魯(Kolu Li), 黃祐 日(Wooil Whang), 李儀景(Yiking Li), 김법린(Kin Fa Lin) 4인이었다. 이들 4인의 소속은 이극로와 황우일이 서울 한인작가․언론인협회(Verein Koreanischer Schriftsteller und Journalisten, Seoul), 이의경이 재독한 인학생회(Verein Koreanischer Studenten in Deutschland), 김법린이 재 법한인회(Verein Koreanischer in Frankreich)로 등록한 것이 확인된 다. 49) 김준연과 허헌은 비공식적으로 참여하였다. 43) 동아일보 , 1926.9.10일자, 「朝鮮의 參考資料 上海에서 募集해」. 44) 동아일보 , 1926.12.17일자, 「被壓迫民族大會」. 45) 조선일보 , 1927.1.17일자, 「弱小民族大會 全世界響應」. 46) 조선일보 , 1926.12.24일자, 「朝鮮代表派遣說로 神經過敏한 當局」. 47) 당시 국내 신문에서는 대회 명칭을 피압박민족대회나 약소민족대회라고 번역했다. 세계약소민족대회(김법린, 이극로의 회고)나 피압민족반제국주의대회, 반식민지압박 민족회의라는 표현도 있었다. 공식 명칭은 International Congress against Colonial Oppression and Imperialism인데 직역하면 ‘국제 반식민압제․제국주의 대회’다. 본고 에서는 학계에서 통용되는 ‘(세계)피압박민족대회’를 사용하였다. 48) Liga gegen Imperialismus und für nationale Unabhängigkeit(1927), Das Flammen-zeichen vom Palais Egmont, Berlin, Neuer Deutscher Verlag, p.229. 49) Liga gegen Imperialismus und für nationale Unabhängigkeit(1927) p.234.; 원문의 Wovil Whang은 Wooil Whang의 오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