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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의 민족의식 형성과 실천 65 …그러느라니, 나의 스물두살에 이르렀고, 젊음을 구사(驅使)하기엔 무 엇인가 내 안에 허전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 길로 만주(滿 洲)로 가서 독립군(獨立軍)에 가담할 것이냐, 아니면 미주(美洲)로 건너가 서 학업(學業)을 계속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심각히 생각하던 끝 에 우선 다시 상해(上海)로 가서 영어(英語)와 중국어(中國語)를 공부하 기로 했다. 34) 후자의 길을 택한 김법린은 중국 南京 金陵大學에 입학하여 어학을 공 부하였다. 진링대학은 1888년 미감리회 해외선교회 책임총무 파울러 (C.H.Fouler)가 설립한 기독교 학교다. 국내 지사 가운데 여운형(1916년 수 료), 조동호(1917년 졸업), 김원봉, 이여성, 김마리아와 같은 이들이 다녔다. 김법린은 어학을 익힌 뒤 당시 학생들이 미국이나 독일 유학을 택하 는 유행과 다르게 프랑스행을 결정하였다. 중국 留法儉學會에서 유능한 중국 청년들을 선발하여 프랑스 유학 후원 길이 열린 점이 도움 되었 다. 35) 김법린은 중국인으로 가입적한 다음, 범어사 은사들이 보내준 여 비와 佛和辭典 단 1권 소지하고서 1920년 말 유학길에 올랐다. 김법 린의 이름은 의용승군 사건 때까지만 해도 金法允으로 되어 있는데, 일 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유럽명 ‘Kin Fa Ling’ 은 개명한 김법린의 한자를 중국 발음으로 옮긴 것이다. 2. 프랑스 유학과 항일 행적 1) 프랑스 유학 과정 김법린은 1921년 2월 파리에 도착하였다. 그렇지만 언어불통으로 4월 경 플레르(Flers)36) 시립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년 간 어학 공부를 했다. 34) 김법린(1963) pp.63-64. 35) 동아일보 , 1927.3.23일자, 「朝鮮側委員 金法麟氏 略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