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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한국불교학 53집 편찬을 담당한 기구는 임시사료편찬회로서, 총재에 안창호, 주임에 이광 수가 맡았고, 김두봉이 핵심 실무자였다. 1919년 7월 초부터 사료수집 목적으로 국내로 특파된 4,5인 가운데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음에도,31) 김법린은 1884년~1910년까지의 사료 수집 지령을 받고서 서울로 잠입했다. 그는 해인사의 임환경(1887-1983) 외 7, 8인의 동지를 데리고 현채(1886-1925)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수십일 간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의 신문기사와 여타 사료를 베낀 뒤 평안 도 노동자로 변장해서 무사히 귀환하는데 성공했다고 회고하였다. 臨政의 命令에 의하야 金法麟은 安東縣으로부터 서울로 와서 甲申以 後 庚戌까지의 史料를 모집하게 되얐다. 海印寺 林幻鏡師외 七,八人의 同 志가 桂洞 玄采先生을 拜訪하고 皇城新聞, 大韓每日等 新聞記事及其他史 料를 數旬동안 密室에서 抄錄하야 싸서 짊어지고 두루막도 벗고 삼베 두 건을 쓰고 平安道 勞動者의 行裝을 차리고 北行…32) 1920년, 신상완은 임시정부의 찬동을 얻어 승려비밀결사인 義勇僧軍 을 조직하고자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4월 6일 종로경찰서에 붙잡혔다. 33) 미체포된 김법린은 ‘만주 독립군이 되느냐, 유학을 떠나 학업을 계속할 것이냐’하는 기로에서 고심하였다. 1919년 7월경부터 무력양성이 광복의 유일한 길이라는 데 통감한 불교 청년들이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파견되 었다. 해인사의 박달준․김봉률, 대흥사의 박영희가 그러한데, 김법린은 이를 관망하며 갈등했던 것 같다. 서울, 국사편찬위원회, p.v. 31) 李光洙(2005), 「緖言」,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7(한일관계사료집), 서울, 국사편찬위 원회. p.4. 32) 김법린(1946) pp.79-80. 33) 국사편찬위원회(2002), 「(高警第一二五七四號)不逞僧侶檢擧ノ件」, 韓國獨立運動史(資 料38: 宗敎運動篇) , 서울, 국사편찬위원회, p.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