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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둔전 삼백일경을 租借(조차)하여 군자금을 만들고 조선청장년을 모아서 군사훈련을 시켜 광복군의 모체적 역할이 되었다. 기미 3·1운동이 좌절되자 길림성의 의열단에 참가 5월 義擧(의거)를 계획하고 국내로 잠입 金元鳳(김원봉) 장군을 중심으로 金祉燮(김지섭) 金始顯(김시현) 柳時泰(류시태) 洪鐘佑(홍종우) 黃鈺(황옥) 南廷珏(남정각) 劉錫鉉(유석현) 李賢俊(이현준) 白英武(백영무) 柳秉夏(류병하) 등 여러분과 모의하여 만주로부터 폭탄 36개 권총13정 폭탄장치용시계 6개 조선혁명선언서 및 조선총독부의 투항권고문 2,000매 등을 국내에 반입하여 거사 일보직전에 동지 12인과 함께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7년 2월 신간회 중앙회총본부 총무와 경북대구지회장을 겸임하시면서 30여 세포와 만 여 회원을 포섭 활약 중 밀양에서 검속되었다. 日帝末(일제말)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고향에서 광복의 시운을 기다렸다. 1945년 광복 후 과도정부 경상북도 부지사 1946년 1월 대구부 초대 부윤에 취임하였으나 군정의 비위에 환멸을 느껴 같은 해 6월에 사직하였다. 1946년 9월5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 위원장 남조선경제신문사 사장 대종교남사도본사 宣範(선범) 등을 역임하는 등 한평생을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 바쳤으며 1949년 12월 4일 향년 70세로 생애를 마쳤다. 국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海隱公(해은공)은 池吾公(지오공)의 친동생으로 諱(휘) 康熙(강희)이니 1899년 11월 2일 無怠(무태)에서 태어나셨다. 형 池吾公(지오공)을 따라서 간도를 거쳐 상해로 가서 몽양 여운형 선생의 도움으로 상해 호강대학교에 재학 중 兄(형)인 池吾公(지오공)의 의열단 사건으로 투옥되자 국내에 잠입 신간회 부산지회 총무 부산학우회 서무간사 부산협동조합장 등 민족운동에 진력하다가 1928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盧且用(노차용) 張澤遠(장택원) 鄭大鳳(정대봉) 등과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을 도우기 위해 비밀결사 「ㄱ」 黨(당)을 조직 활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망명 龍井(용정) 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