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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친일행적. 홍난파(1898~1941) 본명 홍영후 창씨명 모리카와 준. 1931년 8월 미국에 유학해 이해 12월 미주 흥사단에 가입 후,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37년 11월 자필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을 후회한다는 취지의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써 경성지방법원에 제출했다. "사상전향을 결의하고 나의 그릇된 생각과 마음가짐을 바꿔 과거를 청산하고, 금후는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온건한 사상과 정당한 시대관찰로써 국가에 대해 충성을 꾀하며, 민중에 대해서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 1938년 6월에는 사상전향자 단체인 대동민우회에 가입하면서 "조선 민중의 행복은 내선(內鮮) 두 민족을 하나로 하는 대일본 신민이 되어 신동아 건설에 매진함에 있다"는 취지의 전향성명을 발표했다. 1937년 5월부터 친일문예단체에 위원으로 참여해 활동했다. 1941년 1월 조선음악협회 평의원,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에 각각 선임되었다. 홍난파가 작곡한 대표적 친일음악은 '정의의 개가', '공군의 노래', '희망의 아침' 이다. 천황폐하의 분부 받들어 팔굉일우로 대아세아의 대공영권을 건설하여 일장기 날리면서 자자손손 만대의 복누랄 국토....(이광수 작사, '희망의 아침 가사중 일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40년 7월 7일자에 발표한 '사변 3주년과 반도문화의 여명' - 지나사변과 음악에서 '우리의 모든 힘과 기량을 기울여서 총후국민으로서 음악보국운동에 용왕매진할 것을 가지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