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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919년에 우리나라가 자주독립을 위하여 김교선 박영학 이백하 동지들과 ??단을 조직 음 3월 1일 아우내장터로 집결토록 하여 청주 진천 천안 등지에 연락한 뒤 선생은 류관순렬사를 비롯한 김상철 조인원 류중천 동지들과 합세하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이어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병천 일본헌병 분견소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청사를 파괴하시다가 포악무도한 왜병에게 채포되셧다 서기 1919년 5월 2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유죄언도를 받고 불복공소하였으나 형량 변동없는 판결을 받고 다시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여 2년형으로 굳어저 복역하고 나오시다. 그 후 고향을 떠나 논산군 채온면 심암리로 이사하시여 은둔생활을 하시다가 구국일념의 한을 안은 체 만주로 망명하시다. 부인 방복순 여사와의 사이에 3남5녀를 두셨는데 장남은 광현 차남은 세현 삼남은 옥현이요, 장녀는 은숙, 차녀는 애숙인데 이밖에는 미상하다. 선생의 애국충절을 기리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이 추모비를 세운다. 서기 1984년 갑자 8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