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page


346page

교사에게 추천 이화학당에 학비면제 입학케 하였다. 1919년 3월 1일 민족의 분노가 폭발 서울에서 손병희외 33인의 주동으로 주권회복을 위한 시위운동이 전개되고 이 소식을 접한 공은 아우내에서도 이에 호응 봉기할것을 결심 군중동원이 용이한 아우내 장날인 그해 4월 1일 음 3월 1일를 봉기일로 정하고 교우들을 중심으로 동지들을 규합 태극기 제작등 만반의 준비를 완료하고 전날밤에도 매봉산에 올나 봉화를 신호로 재 다짐하고 당일 새벽 천안 진천 청주 3개 요소에 연락원을 보내 들어오는 동지와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배부 적극호응토록 하고 특히 천안방면에 배치한 2남 병호에게는 유일무이한 통신시설인 병천과 천안간의 전화선을 절단 두절케하였다. 공은 교우와 마을 사람들을 인솔 왜경주재소 앞으로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의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왜경이 혼비백산 주재소앞으로 쪼겨 총격을 가하고 이어 긴급출동한 왜군헌병대가 도착 비무장군중을 향하여 무차별 총격 또는 총검으로 난자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그 비참한 광경은 목불인견이었다. 공도 흉탄에 부상을 입고 진천병원에서 가료 중 왜경에게 체포되여 갖은 악행과 고문 끝에 공주지법에서 7년형의 선고를 받고 불복항소 2심인 서울 복심법원에서 3년 감형 옥중에서도 끊임업는 항일투쟁으로 한때 격리수용까지 당하고 고문의 여독으로 상처부위에서는 부패벌래가 나오는 등 갖은 고통을 격으며 형기를 맟이고 출옥하였으나 일제의 감시와 3년의 옥중생활로 가세는 기울고 호구지책도 곤란한 속에 한 많은 일생을 맟이신 애국지사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