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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유의석선생 묘비. 충의로 일생을 마치고 이곳에 잠드신 독립투사 류우석 선생은 아명이 관옥 호가 옥계 또는 백노이시니 서기 1899년 5월 7일 천원군 병천면 지령리에서 류중권 선생과 이소제 여사의 맏아들로 태어나시니 순국처녀 류관순 열사의 오빠이다. 어려 한학을 배우다가 아버님이 설립하신 홍호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서울 배제학당을 거쳐 공주영명학교 재학중에 기미독립선언이 발표되자 동지들과 공주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되었다. 이때 아우내 만세운동 주동자로 검거되어 공주에 압송되어 온 누이 관순을 만나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총살당한 사실을 알고 일제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1년만에 출옥하여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조국수호회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원산청년회 사건으로 4년 옥고를 치렀다. 다시 함흥단천 청진만 주연 해주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시다가 피검되셨고 양양강릉고성 등지에서 설악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주도하시다가 일곱차례나 검거되셨으나 끝내 굽히지 않으셨다.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니 옥고에 지친 몸을 이끌고 대한노동총연맹 독립노동당 전국혁명자 총연맹유도회유도 청년회 독립운동자동의회순국선열유족회 등을 조직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회의 산업분과 위원등으로 반탁운동 및 남북통일 과업 추진에 헌신하시다가 1968년년 5월 28일 향년 69세로 영면하시니 사회장으로 모시었다. 부인 조화벽 여사는 조영순 목사의 따님이다. 개성 호수돈여학생으로서 기미년 3.1운동때 개성만세운동을 주동하고 이어 양양만세운동을 크게 일으켰다. 그후 공주 영명여학교 교사로 재직중 아우내 만세운동으로 부모를 잃은 류관복 관석 형제를 거두어 양육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셨다. 서울 배화 개성호수돈여학교로 옮기면서도 관복 3형제를 동기 같이 보살폈으며 류우석 선생과 결혼한 후에는 원산진성여학교에 근무하면서 부군의 원산청년회 활동 적극 도우셨다. 부군이 4년만에 출옥하여 양명의 곁을 떠나시니 양양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병구완을 지성으로 하여 효녀의 칭송이 자자했으며 정명학원을 설립하여 민족정신을 일깨우다가 일제강압으로 폐교당했다. 조국이 광복된 후 월남하여 부군의 개국활동을 도우시다가 1975년 9월 3일 향년 80세로 영면하시니 정부에서는 류우석 선생에게 건국포장을 부여하고 화백 여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거룩하시다. 백노선생 내외분이시여! 아내 지어머니 누이 한가족이 함께 이 나라의 수호신이 되어 온 겨레의 추앙을 받으시니 그 호국정신은 이 겨레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빛나시리라. 서기 1984년 10월 12일 천원군수 윤형영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