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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바르게 살다가 의롭게 죽기란 어려운 일이다.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살다간 위인들을 추앙하고 교훈으로 삼아왔다. 여기 만송 유정근공이 바로 그와같이 살다죽었으니 공은 한국독립운동사에 찬연히 빛나고 공의 투쟁과 순국은 헛되지 않아 조국의 자주독립과 번영을 가져오게 하였다. 공은 기계유씨 경안공의 15세손으로 1889년 10월 17일 충남 천원군 병천면 봉항리에 출생하여 1941년 음력 1월 11일에 장서 순국하니 년이 53세다. 공은 일찌기 한학과 기호학교를 졸업하고 대동법률전문학교 재학중 제한말엽의 국운이 기울어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느끼고 망명을 떠나니 약관 22세였다. 이로부터 공은 만주 상해 노령등지를 전전하며 국권회복운동을 했다. 그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크게 활동하고 임정의 의정원 의원과 민단부장등 요직을 역했다. 그러니 공은 독립운동에는 무력항쟁이 더 효과적이라 생각하고 만주에 가서 독립군의 수뇌참모가 되어 청산리전역등에 분전했다. 또 때로는 군자금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활동하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1925년에는 동?만주의 무력항쟁통합체인 신민부를 조직하는데 힘쓰고 재정 민정 심판등 각부 위원장과 군사위원장을 담당하면서 김좌진장군과 일심동체가 되어 활동하다가 1928년 1월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15년형을 받고 평양 또는 서울 마포감옥에서 복역했다. 옥중에서도 공의 구국의 의지와 투쟁정신은 추호도 꺽이지 않아 전대미문의 옥중 독립만세사건을 주동하는등 공의 생애는 오직 구국을 향한 불사신이요 활화산이었다. 그러나 공은 무려 15년의 망명생활과 전후 16년의 감옥생활 그리고 모진고문과 형벌로 기진맥진하여 마침내 1940년말 혹한에 빈사상태로 병보석출옥된지 월여만에 영면순국했다. 공의 30여 성상에 걸친 조국애의 의지와 일관된 투쟁 그리고 형극의 생애와 거룩한 순국앞에 우리는 다만 경건하고 엄숙할 따름이다. 공 서후에 계자 병성 입적 봉제하고 대한민국건국훈장 추서되니 공의 영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