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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일제에게 국권이 침탈되자 조국 광복의 염원을 안고 고국을 떠나 만주와 해삼위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국권회복 운동을 하다가,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상해로 갔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활약하였으며, 홍 진·신규식·이명교 등과 함께 임정의정원에 충청도 대표로 선임되었다. 이어 재정심사위원회, 예결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약하였고, 민단부장에 임명되어 교민들의 활동을 통활하였다. 1922년 3월경 북로군정서 김좌진의 요청으로 다시 만주로 건너가 군정 양면에서 김좌진을 충실히 보좌하였다. 1923년 5월 독립군의 군비강화를 위하여 백야(白冶 : 김좌진의 號)의 밀명을 받고 보천교도(普天敎徒)인 신찬우)와 함께 국내에 특파되었다. 그는 '대한독립군총사령부파견 군자금 모집책' 또는 '김좌진장군의 밀사'로 불리었는데, 주로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으며, 당시 교세가 대단하던 보천교주 차경석을 만주로 데려갈 계획을 세웠다. 그는 백야의 동생인 김동진을 비롯하여 33인의 한 사람인 김완규와 김항규·김병희·신찬우 등과 접촉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나 마침내 일경에 탐지되어 체포되었으며,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5년 11월 27일 출옥하여서는 "썩은 만주밤을 7일이나 먹고 단식동맹운동을 벌였다"고 옥중투쟁의 일화를 말하기도 하였다. 출옥후에는 일경의 끈질긴 감시를 따돌리고 다시 만주로 탈출하여, 1925년 3월에 김혁·김좌진 등이 발해의 고지인 영안에서 조직한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하였다. 그는 중앙집행위원회의 경리부 위원장에 선임되어 무력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눈의 가시처럼 여기던 하얼빈 일영사관경찰대는 중국 군벌의 지원을 받아 중동선 석두하자(中東線石頭河子)에서 신민부의 비밀본거지를 포위 습격하여, 1927년 2월에 집행위원장 김 혁을 비롯하여 그와 본부 직원이 모두 체포되었다. 그는 1929년 7월 2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34년에는 옥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형언할 수 없는 폭행과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