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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원곡-양성 독립항쟁기념탑 명 병서(三.一運動 元谷-陽城 獨立抗爭紀念塔 銘 幷序) 민중(民衆)은 풀과 같아 삭풍에 쓰러지고 시들기 쉬우나 그 생명은 끊이지 않으니 때가 되면 다시 피어나 천지를 녹색으로 뒤 덮는다. 뭇 짐승이 뜯고 밟고 할퀴어도 자라기를 멈추지 않나니 민족의 역사도 이 같이 영구히 빛난다. 아아! 己未年(기미년, 1919년) 요원의 불길은 민족(民族)의 정기(精氣)를 만방에 떨쳤다. 간악한 왜적(倭敵)이 庚戌年(경술년, 1910년 8월) 우리 국권(國權)을 병합(倂合)하기 전부터 겨레는 의병(義兵) 항쟁 등의 국권회복운동을 이어왔고, 마침내 기미년(己未年)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으로 삼천리를 진동시켰다. 안성(安城)의 원곡(元谷)과 양성(陽城) 면민들은 4월 1일(陰 3월 1일) 이덕순, 이유석, 이근수, 최은식, 이희용 지사(志士) 등의 주도와 주민의 자발적 참여로 왜적(倭賊)을 소탕하였다. 그날 밤 양성으로 진격하던 1천여 원곡 면민들은 이 성은고개(만세고개)에서 왜적 축출을 맹세하였다. 노도(怒濤)같이 달려간 원곡주민들은 양성주민들과 합세하여 2천여 대군을 형성, 태극기와 횃불아래 만세(萬歲)를 부르면서 전화선을 절단, 경찰관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쳐부수며 불태웠고 왜적들은 발포(發砲)하며 저항하다 도망쳤다. 시위대는 원곡으로 돌아가 면사무소를 불태우고 경부선 철도를 차단하고자 평택(平澤)으로 진출 도중 헌병대 추격 소식에 남산(南山)으로 입산, 항쟁 준비 후 해산하였다. 이후 서부 안성일대는 이틀간 해방지역이 되었으나 왜적의 만행으로 순국 24위, 옥고 127인, 민가 소실 9동, 배상 1만1천 여원, 취학방해 등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원곡(元谷).양성(陽城)의 항쟁은 황해도 수안, 평북 의주 옥상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재판에 증빙된 3.1운동 3대 실력항쟁 중에서도 대표적인 의거였다. 참으로 거룩한 승리였다. 이에 명(銘)을 지어 천추만대(千秋萬代)에 전한다. 4월 초하루 밤 성은고개의 함성이여 지사(志士)의 사자후(獅子吼)에 민중은 호응하였네. 원곡 양성의 면민들 노도같이 합세하여 왜적(倭賊)들을 축출하고 소굴을 불태웠네. 거룩하다! 3·1운동에 으뜸이 되니 정의는 영원히 시들지 않아 만세(萬世)에 빛나리! 辛巳年(신사년, 2001년) 6월 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문학박사 이성무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