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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국제적 흉적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한민족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국내외에서 항일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중 때마침 만국평화회의에서 월순아 제창한 민족자결주의가 채택되자 우리겨레는 자주독립을 할수있는 호기를 얻어다 기미년(서기 1919)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조선이 자주독립군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하였다. 이때 서울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의 함성이 충천하자 저 간악무도한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수 많은 애국지사들이 무참하게 희생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곳 오수지방의 만세운동은 유달리 계획이 치밀하였고 시위규모가 굉대(宏大)하여 피화(被禍)도 혹심하였다. 오수는 원래 남원의 한 고을로서 산천이 수려한대더 고래로 남원 임실 장수 순창에 통하는 교통이 중심지로 찰방역이 있어 이 근방에서 역사적으로 수 많은 현민들이 배출되니 일찌기 교화가 넓고 깊게 미쳐 ○곡이 돈후하고 충의를 숭상하하여 미물인 개도 주인을 의하여 의롭게 몸을 바친 이름있는 고장이다. 따라서 이 지방에서 보다 치열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곳 오수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기송은 일찌기 독립운동에 투신한 신망높은 우국지사이다. 동지 오병용과 함께 서울의 3.1독립운동이 참여하고 그곳 지도본부와 연락하면서 이 지방 심상용 이조열 이주의 이기○ 이용의 이윤의 김종윤 이만의 이영의 이송의 이창준(무순)등 여러 지사들과 모의하여 오수를 중심으로 한 인근 면리에까지 지도책을 두고 대규모의 성과를 거둘수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거사일을 3월 23일(음 2월22일) 오수 장날로 정하였다. 이 날에 사용한 태극기는 이기송의 집과 이기상의 서당 그리고 이병용의 집에서 수천개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3월 2일 박판덕의 독립선언문 게시가 있었고 3월 10일 오수보통학교 일부 학생들이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3월 18일 김일○이 오수시장에서 다수인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으나 다음 장날의 일대 거사를 의식한 주민들이 확대하지는 않았다. 23일 오수시장에는 둔남 삼계 지사 덕과 성수 산서 보절 기매등 인근 면과 남원 순창 장수 등지에서 까지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다. 오전 10시 이기송이 시장에 모인 군중앞에서 조선독립의 당위성과 만세운동이 절실성을 역설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이에 호응하는 2천여의 군중이 시장과 원동산에 집결하여 준비되었던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왜경주재소를 습격 구금되어있던 이기송을 풀어내고 면사무소에 들려 면직원들을 합세케하여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는 등 일대 시위가 일모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남원의 헌병대와 임실의 왜경들이 출동하여 총검으로 진압하니 허박이 적의 총에 맞아 순사하였고 수십명이 부상하였으며 40여명이 체포되므로 군중이 한때 해산되었으나 밤이되어 어둠을 타고 다시 모여든 34백명의 군중은 날이 밝을때까지 만세를 위치며 시위하였다. 이 오수의 3.1독립만세운동은 유교 불교 천도교와 기독교등 모든 종교인이 함께 참여하였고 교육자 학생 관리와 민중이 함께 뭉치고 7~8개 면의 주민이 일치단결하였으니 충의로써 나라를 찾는데는 종교와 신분 지역의 구별을 초월하여 생명을 바치겠다는 거룩한 항일투쟁이었다. 이떄의 희생과 전통적인 충의의 얼은 광복을 얻는 씨알이 되었다. 이에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충혼을 위로하면서 길이 자손만대에 호국의 귀감이 되게 하기위하여 지방민의 정성을 모아 이 탑을 세우고 여기에 간략한 운동의 사실과 찬명을 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