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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시에 교실에 들어선 선생은 정장을 하신채로 교단에 쓰러지시며 울분을 터트려 통곡하셨다. 그뜻을 묻는 제자들께 나라잃은 설음과 국내외정세를 설명하니 어린 제자들도 감동되어 첫교시가 끝나는 종을 신호로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니 보통학교학생으로서는 국내에서 유일의 의거로 일본인 교장과 주재소장들의 간담을 서늘케하였으며 이 운동을 더욱 확산전개코자 둔남면을 위시한 인근 8개 면의 학부형을 야간에 방문하고 이기송, 오병용, 이윤의씨 등과 모의 거사일을 오수장날인 3월 23일로 정하였다. 운집한 군중들이 손에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선언문 낭독과 만세를 고창하니 이운동이 25일까지 계속되어 일경에게 체포 투옥된 애국지사가 부지기수였다. 선생은 남원독립운동 주모자 매호 이석기공의 친질로 숙부와 친척들이 모의하여 4월 3일에는 덕과, 사매에서 4일에는 남원장날터에서 군민독립만세운동을 전개타가 일경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와 투옥자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생이 독립운동의 주모자임이 발각이되자 교직을 사임하고 만주 길림을 거처 로서아 일크스크시로 망명하셨다. 상해임정에 합류 활동중 일경에 체포되어 일본동경에 압송 투옥중에도 동경유학생조직과 독립운동을 계속하시다가 망명당시 일경의 가혹한 고문으로 득병 병세가 악화하여 병보석으로 귀국 1948년 전북도립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