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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하게 탄압받고 단죄되는 법정에도 방청하여 항일투쟁사실을 모았다. 공이 기록한 사실들은 모두 애국지사들의 항일투쟁사실을 수집한 것으로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 우리 민족을 극심하게 강압한 죄상을 밝히며 독립운동하던 선열들의 의로운 거사를 기술한 것이다. 공은 의병활동도 격려하고 사람들에게도 민족혼을 일깨워 주었다. 특히 양병대장 이석용에 대한 일제의 부당한 공판 내용의 잘못을 밝힌 것은 호남 창의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공은 때때로 옥고를 당하는 독립운동지사를 형무소로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사재로 그들의 가족을 돌보아주는 등 남모르게 항일투쟁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공은 일제의 갖가지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3.1운동때는 문하생을 참여케 하면서도 20여년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염재야록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일제침략이 대륙으로 확대되면서 애국지사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면서 공이 수집한 각종 사료와 문집은 모두 압수되었는데 우차로 이용할 정도로 분량이 많았다. 이때 염재 선생도 체포 구금되자 친우되는 이병은은 마침 가지고 있던 염재야록의 2부를 덕촌수록으로 고쳐 보관하고 있다가 광복후에 염재야록으로 간행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 투옥된 공은 일경으로부터 갓가지 회유책으로 유인되었으나 완강히 거절하며 굳건한 정신으로 민족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공의 굳은 결심을 꺽으려고 일경은 가혹한 고문을 하여 생명이 위험해지자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그들이 지정한 임실병원에 연금 치료시키다가 효과가 없자 그대로 석방해서 귀가시켰다. 그러나 이미 소생할 수 없었던 염재 선생은 곧 서거하였다. 배에 전주 최씨 부우하고 안동 권씨 부좌라. 공은 영내 승내 종내의 3남이 있고 홍순호 김장섭 이종국은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