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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石洑(만석보) 기슭에서 數千(수천)의 東學軍(동학군)을 編成(편성)하여 첫 烽大(봉기)를 든 것은 甲午正月(갑오정월) 10일, 20일께는 다시 大擧(대거)하여 白山을 占據(점거)하고 全州城(전주성)까지 陷落(함락)하여 政府側(정부측)과 和解(화해)하기에 이르렀다. 甲午 3월 25일에 起包(기포)한 北接大接主(북접대도주) 崔贊國都接主(최찬국도접주) 崔承雨接主(최승우접주) 金신종 李炳春(이병춘)은 任實(임실)에 執綱所(집강소)를 두고 12개조의 民政改革案(민정개혁안)으로 民弊(민폐)를 一掃(일소)하고 그 餘力(여력)을 오로지 地方組織(지방조직)에만 기울였다. 그런데도 不拘(불구)하고 軍國主義(군국주의) 日帝(일제)의 野慾(야욕)은 突然(돌연) 남의 나라 主權(주권)을 侵害(침해)하면서 競爭(경쟁) 相對(상대)의 淸國軍(청국군)을 敗走(패주)시키고 韓半島(한반도) 全域(전역)을 獨占(독점)하고자 날뛰게 되니 정영 國家(국가)의 命脈(명맥)이 風前燈火(풍전등화)가 되고 말았다. 이에 한동안 執綱所(집강소)를 設置(설치)하고 弊政改革(폐정개혁)과 地方(지방) 組織(조직)에 沒頭(몰두)했던 任實(임실)의 東學軍(동학군)도 다시 起包(기포)하여 南原(남원)의 都接主(도접주) 金洪基(김홍기)와 柳泰洪(유태홍)과 같이 南原(남원)에서 泰仁(태인) 金開南軍(김개남군)과 合流(합류)하고 甲午(갑오) 八月(8월)에는 東徒大將(동도대장) 全琫準(전봉준)과 全州(전주)에서 合勢(합세)하여 任實(임실)의 東學軍(동학군)은 參禮(삼례) 論山(논산)을 거쳐 公州城(공주성)을 攻略(공략)하게 되었다. 그러나 日本軍(일본군)의 增援部隊(증원부대)가 近代(근대)의 무서운 殺人武器(살인무기) 機關銃(기관총)으로 連續猛射擊(연속맹사격)을 퍼붓게 되니 惡戰苦鬪(악전고투) 三日(삼일)만에 任實東學軍(임실동학군)도 莫大(막대)한 犧牲者(희생자)를 내면서 戰友(전우)들의 屍山血河(시산혈하)를 넘고 넘어서 論山(논산) 方面(방면)으로 後退(후퇴)하였다. 甲午八月(갑오8월) 南原山東面(남원산동면) 後谷(후곡) 女院峙(여원치)에서 數千名(수천명)의 東學軍(동학군)이 戰死(전사)하였고 南原(남원)의 都接主(도접주) 金洪基(김홍기)는 甲午(갑오) 十二月 二十七日(12월 27일) 李應白(이응백)에게 逮捕(체포)되어 乙未(을미) 二月 十三日 (2월 13일) 斬首刑(참수형)을 당하고 崔承雨(최승우) 崔由河(최유하) 金學遠(김영원) 金榮遠(김영원) 韓永泰(한영태) 崔東弼(최동필)은 淳昌回文山(순창회문산)까지 敗走(패주)하여 이곳에서 蟄居生活(칩거생활) 6년 만에 겨우 生命(생명)을 維持(유지)하였다. 그러나 任實(임실)에서 東學軍(동학군)이 起包(기포)한지 九十年 (90년) 만에 새삼 東學革命(동학혁명)의 殉國精神(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잠든 그님들의 넋을 달래기 爲하여 이 비를 세우노니 千秋萬代(천추만대)의 後孫(후손)들은 이 偉大(위대)한 革命精神(혁명정신)을 이어 받아 힘차게 宣揚(선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