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淳昌(순창), 鎭安(진안), 長水(장수), 求禮(구례), 谷城(곡성)등지에 보내어 그 地方(지방)에서 獨立萬歲(독립만세)를 부르도록 示唆(시사)하였다. 任實(임실)에서는 三月(삼월) 二日(이일) 子時(자시)에 運庵面 國士奉(운암면 국사봉) 靑雄面 白蓮山(청웅면 백련산) 德峙面 回文山(덕치면 회문산) 三溪面(삼계면) 원통산, 聖壽面 生岩山(성수면 생암산) 新德面 馳馬山(신덕면 치마산)에서 올리는 烽火(봉화)를 信號(신호)로 郡內(군내) 各地(각지)에 宣言書(선언서)를 뿌리고 大韓獨立萬歲(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불렀다. 萬歲(만세)를 부르던 群衆(군중)은 日帝(일제)의 사나운 銃劍(총검)에 依(의)하여 一段 解散(일단 해산)했으나 그 後(후) 6個月(6개월)동안 繼續(계속)하여 郡內各地(군내각지)에서 大韓獨立萬歲(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任實郡內(임실군내)에서 數百名(수백명)이 逮捕(체포)된 중 3명이 獄死(옥사)하였고 百餘名(백여명)이 實刑(실형)을 받았다. 金榮遠(김영원)은 酷毒(혹독)한 拷問(고문)에 의하여 不具(불구)의 몸으로 獄中(옥중)에서 呻吟(신음)하다가 己未(기미) 八月 二十六日(8월 26일)에 獄死(옥사)하였으며 당시 天道敎任實敎區長(천도교임실교구장)인 韓永泰(한영태)는 三月 二日(3월 2일)에 拘束(구속)되여 背後關係(배후관계)를 頑强(완강)하게 否認(부인)하다가 견디다 못하여 3월 9일 子正(자정)에 혀를 깨물고 옷을 찢어서 새끼를 꼬아 목매여 自決(자결)하였으며 崔鳳商(최봉상)은 내 나라를 잃고 내 나라를 찾자는 것이 무슨 罪(죄)냐고 倭警(왜경)과 싸우다가 酷毒(혹독)한 拷問(고문)에 못이겨 獄中(옥중)에서 殉國(순국)하고 말았다. 己未(기미) 三.一(삼일) 運動(운동)이 일어난 지 六十(육십)餘年(여년)만에 3.1운동의 偉大(위대)한 殉國(순국)精神(정신)을 되살리면서 잠든 그님들의 넋을 달래기 爲(위)하여 이 비를 세우노니 遷推(천추)萬代(만대)의 後孫(후손)들은 愛國愛族(애국애족)의 거룩한 精神(정신)을 이어받아 先進祖國(선진조국)建設(건설)에 邁進(매진)하라 己未(기미) 三一運動(삼일운동)謀議(모의)者(자) 名單(명단) 崔承雨(최승우) 朴準承(박준승) 朴成根(박성근) 姜啓大(강계대) 禹成五(우성오) 朴判德(박판덕) 崔宗洙(최종수) 李康世(이강세) 朴準昌(박준창) 李起東(이기동) 崔良玉(최양옥) 朴永昌(박영창) 朴元燁(박원엽) 許栄(허영) 金漢京(김한경) 朴成言(박성언) 金漢岩(김한암) 金敎升(김교승) 崔宗筫(최종지) 崔宗澤(최종택) 崔汝弼(최여필) 金敎石(김교석) 崔宗煥(최종환) 金敎逸(김교일) 李化永(이화영) 牟洛善(모락선) 崔明國(최명국) 黃喆圭(황철규) 黃俊圭(황준규) 黃承圭(황승규) 朴宗實(박종실) 安敬烈.(안경렬) 尹貴变(윤귀변) 廉析煥(염석환) 金漢翼(김한익) 林在化(임재화) 孔在學(공재학) 朴圭鎭(박규진) 孫太星(손태성) 崔大弼(최대필) 裵碓伊(배대이) 金良洙(김양수) 林喜相(임희상) 朴淳燮(박순섭) 李永道(이영도) 白福南(백복남) 金基先(김기선) 郭元貴(곽원귀) 李明魯(이명노) 朴官洙(박관수) 魯道三(노도삼) 魯道進(노도진)趙英洙(조영수) 崔宗周(최종주) 崔昌植(최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