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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당 고개의 함성 1818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폭발한 만세운동의 거센 물결이 남원에 이르는 것은 3월 2일 새벽. 이기원, 함석헌, 황동주등의 천도교인들에 의해 교구장 유태홍에게 전달된 독립선언서가 남원의 요소요소에 게시되면서부터 였다. 당시 덕과면장으로 계시던 사매면 대신리 이석기선생은 우리 남원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결심을 하시고 친조카인 이광수를 서울에 보내어 3.1운동의 배경과 진행 상황을 알아오게 하는 한편, 1919년 4월 3일 사매면민든 도로보수를 명분으로 이곳 계명당고개에 모이게하고, 덕과면민은 식수행사를 명분으로 덕과면 사율리 동해골에 모여 사매, 덕과면민이 합세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하고 대신리 구장 이형기를 비롯하여 이성기, 이용기, 이광수와 관풍리, 오신리 구장들로 하여금 각 부락에 연락하여 면민을 동원하도록 하고 선생은 남원군 각면장들에게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자는 취지문을 보내고, 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胞諸君)이라는 격문을 지어 일본에 항거할 준비를 하였다. 이윽고 4월 3일 이곳 계명당 고개에 약300여명, 덕과면 동해골에 약 500여명이 모였다. 오전 작업이 끝나고 이석기면장의 격문낭독을 신호로 사매면민은 계명당고개에서 덕과면민은 동해골에서 미리 준비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지기 시작했던것이 바로 남원 독립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면민들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노도와 같이 사매면 헌병 주재소로 집결하여 항거하였다. 사매, 덕과면민 약 800여명의 위세에 놀란 사매면 헌벙 주재소에서는 남원 헌병청에 연락하여 이날 오후 6시경 완전무장한 일본헌병들과 기마순경등의 총칼앞에 군중은 흩어지고 이석기선생을 비롯 김선량, 이재화, 이승순, 이붕기, 조동원등 주도자들을 포박하여 갔다. 그러나 사매면민과 덕과면민의 의지는 꺽일줄을 몰랐다. 이날밤 이형기를 중심으로 몇몇이 모여 다음날 남원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만세운동을 시작하고 포박해간 이석기면장등을 구출하기로 결의하고 밤을 새워 태극기를 제작하고 각 부락을 돌며 만세운동에 많은 사람이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4월 4일 오후 2시 남원 북부시장에 모인 약 2,000여 군중들은 시내를 행진하며 나라잃은 울부짖음을 터트렸으니 계명당 고개와 동해골의 함성은 남원 독립만세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그날의 함성이 계명당 고개에 울려퍼진지 어언 90여 성상이 흘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모든 생을 뒤로하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를 찾기위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던 우리지역 선열들의 고귀한 넔을 기리고 애국충정의 교훈을 후세에 전하고자 오늘 "순군선열의 날"을 맞아 이곳 계명당 고개에 탑을 세우고 그 뜻을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