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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군수 양공 한규 의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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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규는 전라북도 남원(南原) 출신이다. 등에 달 모양의 형체가 있었으므로 유명을 월서라고 불렀다. 용모와 체구가 남다르게 뛰어났으며, 용력이 절륜하였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호탕한 기질이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부사 심의두(沈宜斗)에게 청하여 장정 3백 명을 모집하여 곧 서울로 올라가 난군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심의두가 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91년 선략장군 부사과(宣略將軍副司果)가 되었으며, 1892년 통훈대부 초계군사(通訓大夫 草溪郡事) 겸 내금위장(內禁衛將)이 되었으며, 곧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었다. 이때부터 국은에 감격하여 보답할 것을 맹세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기병하여 농민군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누설되어 중지하였다. 1895년 일제는 명성황후시해를 자행하고 단발령이 내려졌다. 양한규는 피눈물을 흘리며 살 것을 도모하지 않고 가재(家財) 누만금을 흩어 동지를 규합하니 사방에서 의사 수천 명이 모였다. 이로부터 활, 화살, 총포, 탄환 등을 다수 모아 벽처에 깊이 간직하고 명산대천에 기도하여 거의할 것을 도모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되는 것을 본 그는 드디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할 것을 결의하고, 널리 우국지사들과 연락하여 군사를 모으니 영남·호남 지방에서 호응하는 사람들이 1천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1907년 2월 12일(음력 12월 30일)을 기하여 일제히 집합, 남원읍으로 진격하기로 정하였다. 이는 남원 주둔 진위대의 장병들이 음력 연말 연시를 기하여 휴가로 나가고 성내의 병력이 적은 틈을 타서 읍을 점령하고 무기를 접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양한규 휘하의 정예병 1백여 명을 위시하여 참봉 유병두(柳秉斗)의 군사 50명 및 진사 박재홍(朴在洪)·상인 양문순(梁文淳) 등 많은 장병이 모여서 모두들 양한규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지휘를 따르기로 하였다. 2월 13일(음 1월 1일) 닭이 울 무렵 양한규는 검을 짚고 군사들을 지휘하여 바로 읍내로 들어가니, 불의의 진격에 남아 있던 진위대 군사와 순검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으며, 그중 적 경부(警部) 1명은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은 채 겨우 몸을 빼서 도망쳤다. 여기서 의진은 큰 격전 없이 남원에 입성할 수 있었다. 4대문은 의병들에 의하여 파수되었으며, 진위대 등의 무기·군수품은 모두 의병에 의하여 접수되었다. 장병들은 용기 백배하여 앞장서서 달아나는 적들을 추격하니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장 양한규가 유탄에 맞아 땅에 쓰러졌다. 중상이었다. 그는 병사들을 향하여 "나는 지금 죽겠소. 국사가 망극하오. 제공들은 힘써 싸우기 바라오." 하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다만 손에 쥔 검이 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고 전한다. 장병들은 대장을 잃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진의 동요를 눈치 챈 적들이 다시 대오를 정비하고 반격 태세를 취하였다. 당황하고 낙심한 의병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다. 모처럼의 의진의 남원 입성은 이로써 백지로 돌아갔다. 또한 양한규의 남원 입성에 호응하여 남원으로 진격해 오던 녹천 고광순(鹿泉 高光洵)·고광훈(高光薰)·윤영기(尹永淇) 등은 재차 남원 공격을 감행하다가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밖에 많은 의진이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양한규 의진의 부장이었던 박재홍과 양문순은 모두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되어 모진 심문을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