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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 선생은,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조동선(趙東先) 등과 함께 덕과면(德果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덕과면 면장으로 재직하면서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품고, 6촌 동생 이성기·면직원 조동선 및 면내 유지들과의 비밀회의를 통하여 4월 3일의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날의 식수행사는 각 관청에서 연례적으로 행하던 연중행사였기 때문에 일제의 의심을 받지 않고 사전준비가 가능했다. 이에 그는 3월 31일 회의석상에서 각 가정에서 반드시 1명씩 당일 신양리(新陽里) 뒷산의 도화곡(桃花谷)으로 모이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집에서 각 면장에게 보내는 만세운동의 참가 취지서와 「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胞諸君)」이란 격문을 작성하여 각각 20여매씩 등사한 후 면사무소 사환인 김광삼(金光三)으로 하여금 각 면장들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4월 3일, 도화곡에는 유례없는 식수기념일 행사에 8백여명이 참여하였고, 헌병주재소 소장과 보조원들도 점심식사에 초청되었다. 오후의 식수가 끝난 다음, 그는 여기에 참가한 면민들에게 탁주를 대접하고, 이들의 앞에 나아가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너무나 돌발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헌병주재소 소장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으로 변한 행사참여자를 지휘하여 사매면 오신리(巳梅面梧新里)에 있는 헌병분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사율리(沙栗里)를 지날 무렵, 그는 길가에 있던 오백룡(吳伯龍)의 지붕위에 올라가서 격문을 낭독하고 20여장의 격문을 살포하였다. 계속 시위행진을 전개하여 헌병주재소 앞 큰길에 당도하여서는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남원읍에서 헌병분견대장 무장군인이 자동차로 증원 출동하여 사태가 긴박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조동선과 함께 스스로 책임을 지기로 하고 시위군중들을 무사히 귀가시킨 후, 자진해서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이해 10월 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서대문(西大門)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