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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1592) 침략으로도 모자라 왜적 통치자는 정유는(597)에 재침을 명하였고 다시 악귀가 된 왜적은 빼앗고, 불사르고, 베고, 찌르며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구례를 거쳐 남쪽으로 보이는 원촌에 이르렀다. 여기 밤재(栗峙)를 가운데로 동쪽의 숙성재와 서쪽의 둔산재를 짓밟고 넘은 침략군은 북쪽으로 보이는 남원성을 포위 공격하여 민,관을 비롯한 조.명연합군 1만여명을 도륙하였다. 당년 추석 전후의 일이다. 살인귀 왜적은 코베기와 노예화를 위한 인질 포획을 시도했으나 살아있는 생명은 없었다. 약탈, 겁간, 방화, 살육의 잔재만 남았을 뿐이었다. 갑오년(1894)에도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의 토벌군이 되어 토끼몰이를 하면서 북에서 남으로 이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을사늑약(1905), 경술국치(1910)로 우리나라와 민족을 집어삼킨 일제는 이 고개를 약탈과 지배의 수단인 신작로로 만들었다. 왜적 일본에 대처하지 못한 우리 조상들의 잘못이 작지않다. 그러나 전쟁을 비롯한 모든 침략행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악이면서 하늘을 칼질하는 인류 최악의 범죄다. 그런데도 일본은 단한가지, 단한번의 공식적인 반성이나 사과는 고사하고 옛 침략의 환상속에 또 다른 침략의 칼날을 갈고있다. 이에 일본을 극복하지 않은 한 우리에게 평화는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되새기고, 성찰과 실천을 다짐하기 위해 더럽고 잔혹한 왜적 침략의 족적이 찍혀있는 이 자리에 일본이 있는 동쪽을 향해 이 석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