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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후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문화정책으로 전환되고 신사조가 유행하면서 국내에 각종 청년단체가 만들어졌다. 남원청년동맹은 1927년 남원지역에 난립한 청년단체의 결속과 효율적인 활동을 위해 결성되었다. 운봉지역에 운봉지부가 창립된 것은 1929년 3월 13일이었다. 그러나 남원형평사와 운봉 권농회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고, 관할 주재소로부터 정기대회 금지명령이 내려지는 등 전국적인 조직 해체와 검거로 활동이 위축되었다. 그 후 박준상 선생을 비롯하여 안희탁.임철호.박종암.박순영 등과 함께 재조직된 것은 1931년 11월 25일이었다. 선생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신사상에 심취하던 중, 조선의 독립은 계몽운동임을 깨닫고 청년단체의 부흥을 꾀한 것이다. 선생은 동지들과 지역에 신사상을 고취시키고 문맹퇴치 등 농촌계몽을 활발히 전개하여 독립운동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또한 박순영과 함께 농민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소작료 불남운동과 강제 부역동원을 반대하였다. 운봉지부튼 운봉단발회를 결성하여 일반인게 단발의 필요함을 선전하는 한편, 이발업을 경영하여 이발요금을 운동자금으로 활용하였다. 선생은 이 자금으로 각종 사회주의 서적들을 구입하고, 동천리와 서천리에 야학당을 개설운영하였다. 야학을 중심으로 신사상을 전파하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던 중, 1932년 9월 「운봉단발회」활동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선생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남원경찰서에 체포된 박준상 선생은 1934년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에 3년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았다. 선생은 감옥에서 당한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1933년 2월 7일 해방을 보지 못하고 29세에 순직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선생이 활도안 남원청년동맹 운봉지부의 항일운동은 남원 지역의 관료적인 청년운동을 순수한 지역 민중에 의한 계몽 운동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7(정유) 4월 이남일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