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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성은 박씨요. 충주인이며 명은 정주요 자는 화용이니 진사 홍규의 자로 고종 졸년말 정월 29일에 장수면 필덕리에서 출생하였다. 유시부터 품성이 강직하고 언행이 정중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향리에 모범이 되며 문학에 열중하였다. 당시 국운의 불이로 반만년 이어온 국권이 경술년에 이르러 치욕의 비운에 빠졌었으나 연면한 민족정기는 날로 드높아 기미년 3월에 온 계레가 궐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회천의 대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호응하여 이 고장 장수군에서도 선생의 주도로 동지 10여인과 약속한 산서시일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군중의 만세소리 천지가 경동하자 일경의 총압으로 군중은 해산되고 주모 10여인이 체포되여 각각 옥고를 겪었다. 오직 선생은 주도자로 대구재판심문에서 백주에 도적이 가중에 침입하여 물건을 탈취하여 간다고 외친 것이 무슨 죄냐고 고성질책하여 취조관을 상기시켰다. 수년 옥고를 겪은 후에도 임의로 출입을 억제당하였으나 추호도 굴하지 않는 그 애국애족심은 뒷사람들에게 가슴 깊이 새겨저 살아갈 앞길에 등불을 밝혀주셨도다. 광복후 35년이 흐른 기미주년을 맞이하여 필덕리 양노계원 18인이 선생의 장렬한 의거를 추념하고 재천하신 영령의 명복을 삼가 빌며 그지없이 솟구치는 단성을 모와 선생의 출생하신 이 고장에 추념비를 세워 천추에 위적을 전하고저 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