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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0일의 대병면 창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권중박・정시권・유인수・권양희・송헌기등과 밀의를 거듭한 끝에, 3월 20일의 창리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한편 인근부락에도 이 계획을 알렸다. 3월 20일 오후 1시, 그는 장터에 모인 4천여명의 군중에게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장터를 돌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창리 경찰주재소로 달려가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드디어 정문을 박차고 소내로 돌진하였다. 이때 선두로 들어가던 이병추가 순사부장이 발사한 총탄에 관통되어 유혈이 낭자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소내로 밀어닥쳐 순사부장과 경찰들을 실신할 정도로 구타한 후 문서류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어 주재소에서 1백여미터 떨어진 대병면사무소로 달려가 또한 문서류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응원 출동한 수십명의 일본군이 도착하여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면서 시위군중을 검거하기 시작하게 되자 결국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10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