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page


91page

1919년 3월 23일 삼가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김상준과 함께 광무황제의 인산에 참예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서울의 3·1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하였다. 김상준은 고향인 산청군 신동면 평지리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주도하였으며, 윤규현도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동지들을 규합해 갔다. 그는 한필동·허동규·한식동·윤구현·윤승현·허장 등과 더불어 삼가면·가회면·상백면 등 각면의 동지를 규합하면서 거사 준비를 해 나갔다. 그들은 3월 23일 삼가시장에서 거사하기로 합의하고, 면민들로 하여금 그곳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3월 23일 상백면에서는 약 4,000여 명의 군중이 봉기하여 그곳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여 면사무소를 불태운 후 통신을 차단하기 위하여 전신주 2개를 절단하면서 약 10리 되는 삼가시장으로 모여들었다. 가회면민들은 농악을 울리면서 속속 삼가시장으로 몰려왔다. 이렇게 모인 군중은 12,000∼13,000명에 달하였다. 이를 심상치 않게 여기던 일경들이 요소 요소에 배치되었으나 군중들은 위세 당당하게 몰려들었던 것이다. 드디어 오후 3시, 정금당 앞 광장에서 주도 인물들에 의해 일제 규탄의 성토대회가 개최되었다. 임종봉이 열띤 연설을 하고 있는 도중, 일본 헌병이 쏜 총탄에 대퇴를 맞아 단상 아래로 떨어졌다. 이를 본 군중들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하여 곤봉과 낫을 들고 경찰 주재소와 우체국으로 몰려갔다. 이에 놀란 일경들은 일제히 그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순식간에 13명의 순국자와 3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일로 인해 윤규현은 피체되어, 이해 9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