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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파 군자금모집등의 중대임무를 받고 국내로 잠입해서 암약하다가 기미년 3.1운동에 가담하였다. 29세때는 의령서에 악질왜경인 신배수를 사살하고 경북사건의 주모자로서 7년간의 옥고를 겪은뒤 새로 여러번 체포될때마다 악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초지를 불굴하고 지하운동으로 유리방랑할때 혹은 농사일 혹은 광산일일에 품팔이도 하며 가진 고난을 다 겪었다. 그러니 황천이 무심치 않으시와 49세때 조국이 해방되니 그의 숙원은 성취되었다. 그때 경찰계로 들어서 오관구의 감찰서장을 지나고 경찰학교장을 거쳐 고성군수로 재임하다가 고향에서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말기에 6월 25일 동란이 발발하니 자유당 정권은 무책임하게도 부산으로 천도가 된 후에 발?정헌등의 처사를 감행하니 그의 불의에 분개해서 유시태옹의 대통령 저격사건에 협조하여 법정에서 문초를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정권의 적대자가 되어 다시 정계에는 나갈수 없게되니 대구에서 한방의업을 하였는데 계유년 3.1절에는 건국공로훈장을 받고 만년에는 부산에 차자께로 갔어 정양하다가 을유년 8월 6일에 향년 79세로서 서거하시니 원호처의 주체로 고향 초계면 오리정 운산에다 사회장을 하였다. 배는 여선전씨니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