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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佛心燈 譯經弘闡 救國護法 龍城祖師 行蹟碑銘 幷序 전불심등 역경홍천 구국호법 용성조사 행적비명 병서 一千七百年의 韓國 佛敎史를 살펴보건데 三國을 비롯하여 高麗와 朝鮮朝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高僧大德이 出世하여 韓國佛敎의 中興과 國民精神 啓導에 赫赫한 業蹟을 남겼음은 두루 아는 事實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舊韓末 禪敎律에 精通하였을 뿐만 아니라 文殊의 智座에서 분연히 일어나 普賢의 紫陌으로부터 途中事를 시작하여 佛敎의 大衆化와 國民啓導 및 抗日 獨立運動의 旗幟를 높이 들고 大獅子吼를 외쳤던 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己未年 三·一 獨立運動 때 民族代表 三十三人中 佛敎代表였던 龍城祖師이시다. 祖師는 曹溪直下 第三十五代 法孫인 喚惺志安禪師(환성지안선사)의 후예(錦溪元宇 靑波慧苑 百忍泰榮 翫眞大安 枕虛處華 草愚永瑄 南湖幸準 等 七師를 뛰어 넘어 二百餘年을 소급하여 喚惺志安禪師를 遠嗣하였다.)로써 俗性은 白氏 本貫은 水原 俗名은 相奎 法名은 震鍾이며 龍城은 法號이다. 스님은 一八六四年 五月 八日 全羅北道 南原郡 下磻岩面 竹林里(現在의 全羅北道 長水郡 磻岩面 竹林里 二五二 番地)에서 아버지 白南賢公과 어머니 密陽孫氏의 長男으로 誕生하였다. 孫氏夫人이 어느날 밤 한 스님이 金爛袈裟(금란가사)를 입고 房에 들어오는 胎夢을 꾸고 孕胎하여 태어난 스님은 어릴 때부터 寡默하였으며 葷肉이 섞인 飮食은 一切를 먹지 아니하였다. 淸高의 氣質과 溫恤의 情이 남달라 六歲 때 아버지가 낚은 물고기 중 살아있는 것은 許諾없이 모두 놓아주어 아버지가 크게 꾸짖으니 죽어가는 生命을 차마 볼 수 없었다고 울면서 대답하였다. 또 머슴의 동생이 怪疾에 걸려 草幕에 放置된 채 飢餓와 病苦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父母 모르게 糧食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으니 이때 이미 度生의 알을 품은 資質을 감추지 못하였고 九歲 때 全州 合竹扇을 詩題로 내건 鄕塾의 白日場에서 大橈合竹扇하니 借來洞庭風이라 作詩하고 봄날 村童들이 진달래꽃 따는 것을 보고 摘花手裏動春心이라고 卽興詩를 읊어 文才의 뛰어남이 遠近에 알려져 그 英特함에 稱頌이 자자하였다. 少年期에 접어 들자 儒書 못지 않게 佛書를 가까이 하였으며 十四歲 때 佛經을 보다가 크게 느낀 바 있어 父母 모르게 南原郡 蛟龍山城의 德密庵에서 行者生活을 하였으나 父母의 挽留에 依해 還家하게 되었다. 스님은 그 뒤에도 世俗에 뜻이 전혀 없어 一八七九年 다시 出家할 뜻을 굳히고 父母의 간곡한 挽留를 뿌리치고 慶尙南道 陜川郡 伽倻山 海印寺 極樂殿을 찾아가 華月和尙을 恩師로 相虛慧造律師를 戒師로 하여 沙彌戒를 받았다. 곧이어 義城 孤雲寺 水月永旻和尙을 親見하고 無常이 迅速하니 어떻게 하여야 見生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去聖時遙에 魔强法弱하며 宿業障重하여 善弱難排이니 誠禮三寶하며 勤誦大悲神呪하면 自然業障消滅하고 心光透漏하리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大悲呪와 六字呪를 九個月 동안 持誦하다가 楊州 普光寺 兜率庵에서 森羅萬像은 모두 그 根源이 있거늘 人間의 根本은 무엇인가라는 疑團으로 精進하다가 六日만에 忽然히 깨달으니 五蘊山中尋牛客이 獨坐虛堂一輪孤로다 方圓長短誰是道오 一團火炎燒大千이라는 偈頌을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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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八八三年 金剛山 表訓寺 無融禪師를 參訪하여 無字話頭를 決擇받고 다시 普光寺 兜率庵으로 돌아와 勇猛精進하다가 排雲携霧尋文殊타가 始到文殊廓然空이로다 色色空空還復空하니 空空色色重無盡이라는 歌頌을 읊었다. 一八八四年 三月 梁山郡 通度寺 金剛戒壇에서 禪谷律師로부터 比丘戒와 菩薩戒를 受持하니 이는 一八二八年 大隱朗旿律師가 그의 스승인 金潭長老와 함께 智異山 雙溪寺 七佛庵에서 七日間 祈禱끝에 瑞祥受戒한 大隱律師의 戒脈이다. 그해 冬安居는 智異山 金剛臺에서 지냈고 一八八五年부터 順天 松廣寺 三日庵에서 精進하면서 틈틈이 景德傳燈錄을 보다가 金輪可觀禪師의 法語인 月似灣弓하니 小雨多風이라는 句節에 이르러 割然大悟하여 一面佛月面佛話와 無字話頭까지도 渙然明白하였다. 다시 海印寺로 돌아와 精進하다가 伽倻名價高靑丘 明心道師幾往來 矗矗奇岩疊鱗高 密密栢樹相連靑 無限白雲滿洞鎖 洪鍾轟轟碧空衝 回首看山醉流霞 倚樹沈眼日己敍라는 敍景詩를 읊어 自然과 日常이 融合된 境界를 보였다. 一八八六年에 다시 松廣寺 三日庵으로 옮겨 夏安居를 마치고 嶺南으로 돌아오던 중 洛東江을 건너면서 金烏千秋月이요 洛東萬里波로다 漁舟何處去오 依舊宿蘆花라는 悟道頌을 읊었다. 스님은 이와 같이 敎를 거치지 아니하고 直接 禪으로 들어가 悟道한 然後 敎學을 남김없이 涉獵하는 禪敎兼修의 길을 主唱하였다. 悟道後 順天 松廣寺 甘露庵 湖鵬講伯에게서 起信論과 法華經을 受講하고 禪客 三十三人과 함께 智異山 上禪庵에서 한해 여름을 지낸 다음 谷城 泰安寺 水鯨講伯으로부터 禪要와 書狀을 讀破하였으며 이어 上無住庵에서 冬安居를 解制하고 聞慶 淸華山 圓寂庵 石橋律師에게서 梵網經과 四分律을 聽受하면서 夏安居를 解制하고 다시 松廣寺 湖鵬講下에서 華嚴經을 受講하였으며 海印寺의 月華講伯으로부터는 禪門拈頌을 月華講伯이 聞慶 大乘寺로 移錫하므로 講伯을 따라가 華嚴十地品과 緇門警訓을 閱覽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스님은 緇門警訓을 閱覽하던 중 靈雲志勤禪師의 法語인 驢事未去에 馬事到來의 意旨는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에 長安大道亂如絲하니 人去人來終不休라고 對答했다. 또 護明禪師가 明明百草頭에 明明祖師意라 하니 和尙의 見解는 어떠한가라는 質問에 四佛山中에 花紅柳綠하니 禪師가 任意로 遊覽하시구려 하였다. 그 후 金溝郡(現在 金堤郡 金溝面) 龍眼臺의 道植禪師를 參訪 直下에 臨濟老漢을 보았는가? 그때 스님이 大聲一喝하니 禪師가 一棒을 내리치고 拍掌大笑하였다. 二十三歲 때 見性悟道하고 三十歲까지에는 修禪과 經論 語錄 等을 두루 閱覽하였다. 그후 七夏 동안 晦跡韜名하여 保任專注하였다. 一九◯◯年 가을 洪城 天藏庵을 거쳐 定慧寺에 이르러 慧月禪師와 格外宗旨를 擧揚하고 松廣寺 曹溪峰 土窟에서 冬安居 一九◯一年 二月 海印寺 修禪社에서 霽山禪師와 西來密旨를 擧揚하였으며 星州 修道庵에서 冬安居를 지냈다. 一九◯二年 智異山 華嚴寺 塔殿에서 夏安居 中 찾아온 滿空禪師에게 遠路에 路毒이 어떠하며 侍者는 몇 사람인가 하고 물음에 禪師는 侍者도 없고 또한 路毒도 없다는 知彼知己의 法談을 나누었으며 冬安居를 順天 仙岩寺 七佛殿에서 지내고 이듬해 봄 妙香山 上毘盧庵에 修禪會를 創設하였고 金剛山 佛地庵서 冬安居 一九◯四年 二月 鐵原 寶盖山 聖住庵에 修禪會를 開設하였으며 一九◯五年 寶盖山에 觀音殿을 創建하여 住錫하면서 禪門要旨一卷을 著述하였고 그해 가을 三角山 望月寺로 移錫하였다. 이무렵 海印寺 所藏 國寶 高麗八萬大藏經板이 歲久年深하여 大部分의 經板이 板角의 鐵裝飾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