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page


40page

....................... 우리고장 합천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0일을 전후하여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시위 규모도 컸을뿐만 아니라 그 양상도 격렬하였다. 삼가면민과 쌍백면민이 주도한 3월 18일 삼가시위를 시작으로 합천면민과 대양면민이 중심이된 3월 19일.20일의 합천시위, 3월 20일의 대병면시위, 3월 21일 초계면 유림및 학생들의 시위, 3월 22일 묘산면 시위운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대병면과 초계면의 시위는 참가한 군중이 4,000명~5,000명에 이를정도로 대규모였으며, 시위의 양상도 격렬하였다. 이러한 시위운동의 열기는 3월 23일 삼가장터시위에서 절정에 달하였는데, 삼가면, 쌍백면, 가회면뿐만아니라 이웃 산청군 생비량면에서 모인 군중의 수가 무려 13,000여명이나 되었다. 이외에도 3월 28일의 야로면시위, 3월 31일 해인사 학림학생들의 시위, 4월 3일의 가야면 매안리시위, 4월10일의 봉산면시위등이 이어졌다. 이처럼 우리고장 합천의 시위운동은 모두 13회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수만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군중이 시위에 참가하였을 뿐만아니라 시위의 양상 역시 치열하여 지방에서 일어난 3.1운동가운데 가장 놀랄만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일본경찰의 무차별사격과 폭력으로 현장에서 21명이 순국하였으며, 60여명은 총상을 당하였고, 200여명이 검거되며 그 가운데 60여명은 6개월에서 4년까지 징역을 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