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page


245page

폭파 군자금 모집 등의 중대임무를 받고 국내로 잠입해서 암약하다가 기미년 3.1운동에 가담하였다. 29세 때는 의령서에 악질 왜경인 갑배수를 사살하고 경북 사건의 주모자로서 7년간의 옥고를 겪은 뒤 새로 여러 번 체포될 때마다 악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초지를 불굴하고 지하운동으로 유리 방랑할 때 혹은 농사일 혹은 광산일에 품팔이도 하며 가진 고난을 다 겪었다. 그러니 황천이 무심치 않으시와 49세때 조국이 해방되니 그의 숙원은 성취되었다. 그때 경찰계로 들어서 오관구의 감찰서장을 지나고 경찰학교장을 거쳐 고성군수로 재임하다가 고향에서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말기에 6월 25일 동란이 발발하니 자유당 정권은 무책임하게도 부산으로 천도가 된 후에 발췌개헌 등의 처사를 감행하니 그의 불의에 분개해서 유시태 옹의 대통령 저격사건에 협조하여 법정에서 문초를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정권의 적대자가 되어 다시 정계에는 나갈 수 없게 되니 대구에서 한방의업을 하였는데 계묘년 3.1절에는 건국공로훈장을 받고 만년에는 부산에 차자께로 갔어 정양하다가 을묘년 8월 6일에 향년 79세로서 서거하시니 원호청의 주최로 고향 초계면 오리정 운산에다 사회장을 하였다. 배는 정선전씨니 영귀의 녀로서 2남 2녀를 생 하였으니 장남은 재전이요 차남은 재훈이요. 여서는 장욱상 이남두다. [현 부지사] 재전의 남은 원석 성석 태석 녀는 윤만대 최상신이고 재훈의 남은 길석 홍석 욱상의 남은 병기 병국 남두의 남은 종원 종덕 종길 종관이다. 공의 중계에 민용 규용과 ○자에 ○명 재영은 공의 사업에 조력하였다. 오호라 공의 심은 고난의 종자에서는 영광의 결실이 되였으나 공의 유방는 산일되고 오직 정의지란 일소단자만 남았으니 이에서 가히 그의 백절불굴한 정의관념과 구국안민할 경세포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합천군민은 공의 사적을 기념하기 위해 숭모회를 조직하고 그 대표인 조판석 류진호 이창근의 3씨가 상경하여 나에게 비문을 청하니 내 비록 불문하나 그의 거룩한 사업을 협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