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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산(白岳山) 아래 3·1광장에 이 비(碑)를 세운 것은, 2005년 8월 15일 6억5,400만원(주민모금 1억5,000만, 국비 1억1,400만, 도비 3억3,000만, 군비 6,000만)으로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등을 건립한 후, 새롭게 확인된 네 분의 애국지사를 기리기 위해서다. 배숙원 이낙현 최도인 박종생 애국지사는 2차 삼가장터 만세운동 때 공재규 등 3만여명의 군중과 함께 일본 경찰과 헌병의 총칼에 맞서 독립시위를 하다 순국했다. 이때가 1919년 기미년 음력 2월 22일(3월 23일) 삼가장날이었다. 이곳 삼가는,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이 민암부(民巖賦)에서 “대권(大權)을 가지고 있는 백성이 주인이다”고 주창한 남명의 민본사상과 기절(氣節)을 숭상(崇尙)하는 남명 정신이 서려 있는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중심지였다. 3·1만세운동 때 삼가 대병 대양 초계 묘산 단성 진주 군북 우곡(고령) 등 경상우도에서 격렬하게 일본에 맞선 것은,1555년(명종10) 왜구가 을묘왜변을 일으켜 노략질을 일삼자 남명이 철저하게 응징하라고 한 것과, 1592년 임진왜란 때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1536∼1623) 등 남명 문인들이 대거 창의(倡義)하여 국난을 극복한 사실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의병투쟁으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왜적으로부터 지켰다. 합천 출생인 영의정 정인홍이 1623년 서인들에 의한 이른바 인조반정 때 그 흔한 심문조서조차 남겨두지 않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1694년 갑술환국과 1728년 무신봉기(戊申蜂起)를 거치면서 경상우도는 서인(노론)들로부터 반역향(反逆鄕)으로 매도돼 가혹한 차별을 받았다. 집권세력인 서인(노론)들의 부패·독재와 기득권층의 의무불이행이 만연하여 전쟁이 아닌 조약(條約)으로 나라가 망했지만, 애국지사 배숙원 등 경상우도인은 기개와 절조(節操)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앞장서 싸웠다. 400여 년 전 남명과 내암이 일본의 침략성을 간파하고 단호하게 대처한 것처럼 행동으로 실천했다. ‘항일 정신은 남명 및 내암 정신’이기에 … .덧붙여, 2005년 주민들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합천군과 군의회에서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건립비 1억5,000만 원을 삭감했지만, 주민들이 애국심과 애향심으로 뭉쳐 기념탑 건립을 완료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2016년 3월 23일 순국 97주기를 기억하며 조찬용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장 지음